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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례 요한의 증언

본문 / 1:19-28

 

1. 증인의 삶

신자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의 존재 이유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것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 개인을 위한 인생이란 사실상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자로 부름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란 단지 삶의 일부를 그리스도를 전도하는 일에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시간을 내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증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사는 것은 증인인 우리 삶의 전부이지 결코 일부가 아닙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증인의 자리에서 증인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증인의 증인다움은 자신을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로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가?’를 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나 개인을 전적으로 포기한 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에게는 참으로 힘든 고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증인이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삶의 본질이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정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의 본질이 지금 현재 우리들의 삶을 고발하고 책망하며 지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다만 증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인이기 때문에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한다거나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증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일만 있을 뿐이지 그리스도를 증거 했으니까 나는 높임을 받아야 한다거나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증인으로 보내시면서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즉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비록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으로서 받아야 할 별개의 영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도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인 신자는 모든 관심이 증거해야 할 그리스도에게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 만약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증거한 일에 대한 영광을 기대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증거자로서의 참된 모습을 세례 요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요한의 마음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1:19)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요한에게 보내어 요한이 누구인가를 알아 오도록 지시를 합니다.

24절에 보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서 알고 싶은 것은 요한이 어떤 사람이기에 세례를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례는 죄 씻음, 즉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례는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권세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듣자 요한이 어떤 권세를 가진 자인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요한에게 사람을 보낸 것이라기보다는 나름대로 요한에 대한 자신들의 의도가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요한이 세례를 줄 만한 권세가 있는 사람이라면 요한을 자기들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리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에 위기감을 느끼고 그런 의도를 가졌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요한에게 보냄 받은 사람들은 요한에게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묻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그리스도냐?’라고 묻는 내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요한이 20절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그들이 먼저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자 그들은 두 번째로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말라기 3장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3:1)는 말씀과 말라기 4장의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4:5)라는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언젠가는 위대한 엘리야가 다시 나타나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물음에 대해서도 아니라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11:14)고 말씀을 하고 또 마태복음 17장의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17:10-13)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로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하신 엘리야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요한이 겸손해서 자신을 감히 엘리야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아니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요한이 당시에는 자신이 곧 오리라고 한 엘리야로 보냄 받은 것을 몰랐기 때문인 것이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어떤 추측을 해도 성경에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상 정확한 답은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그 상황에서 세례 요한에게 오리라고 한 엘리야로서의 역할이 있음을 언급하는 것은 오늘 본문 2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소리로서의 분명한 역할을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비록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언급을 하셨지만 요한 자체가 엘리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한을 엘리야의 역할로 사용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요한의 편에서 자신을 엘리야로 광고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요한을 엘리야로 사용을 하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세례 요한이 내가 엘리야다라고 자신을 증거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자신이 엘리야로 보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오늘 본문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1:23)고 하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앞에서 요한은 다만 소리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란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 자로 쓰시고 있다는 것뿐이지 목사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목사임을 증거하고 내세울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그리스도의 종으로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실제 엘리야가 올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내가 엘리야다라고 답을 한다면 그들은 요한을 실제 하늘로 간 엘리야로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답한 요한에게서 우리는 예수님이 요한을 누구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요한이 알았든 몰랐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다만 소리라고 말하고 있는 그 고백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는 요한의 거부가 곧 오늘 우리들의 거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세 번째로 선지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역시 신명기 18장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18:15)고 하는 말씀과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18:18)고 하신 하나님이 약속, 즉 언젠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라는 약속을 잘못 이해하고 믿어온 사람들의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역시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니라는 짧은 답을 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6:13-14)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엘리야 또는 선지자로 이해를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시각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온다면, 엘리야나 선지자처럼 상상도 못 할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올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람의 겉을 보고 판단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보낸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요한에게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서 요한이 누구인가를 말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너는 이냐?’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누구냐?’라고 물을 때 나는 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를 하고 있지 않는다면 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책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자신의 존재를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목사가 나는 목사다거나 또는 나는 모 교회 담임 목사다라는 식의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 앞에서 누구인가를 염두에 두고 산 사람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목사가 그리스도 앞에서 목사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직책과 직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 앞에서의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닙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나를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 답을 요한의 답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요한은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1:23)고 답합니다. 너는 이냐라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했던 요한은 자신에게 어떤 중요성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한 자신은 다만 소리라고 말할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요한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 것이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중요성을 두지 않는 것은 증인으로서의 진정한 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봅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오실 주가 누구인가를 바르게 증거하는 일을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리라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전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리에 지나지 않는 나를 보지 말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를 보라는 것입니다.

소리란 그 소리를 내는 자가 있기에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는 소리를 내는 자를 보게 하는 것이지 소리를 통해서 소리를 확인하고 소리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즉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자신을 철저히 그리스도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자신은 할 일을 하고 사라지는 존재일 뿐 자신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되고 드러나야 하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례 요한이 이러한 답을 할 때는 예수님이 아직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신 때입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요한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란 결국 나는 나의 소리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요한의 외침이 요한의 안에서 외치는 그리스도의 외침이라면 우린 세례 요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요한의 외침은 요한 자신의 말이 아니라 요한의 안에서 외치는 주님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소리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치는 분은 그리스도이시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장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산 것이 아니라 요한의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셨던 것입니다.

이제 요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부디 요한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 자신 역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고 내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며 나는 그분의 소리일 뿐이라는 신앙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증인의 삶

그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요한의 말에 그렇다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례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입니다. 그런 세례를 아무런 권세도 없는 요한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요한은 오늘 본문에 보면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1:26-27)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면에서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자로만 머무르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주는 세례조차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세례로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이 세례를 주는 것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세례 역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요한은 자신과 자신의 세례는 앞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을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말함으로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 즉 사람이 보낸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사람이 보낸 사람들은 오직 사람만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고 그가 어떤 자인가를 아는 것에 급급할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보낸 사람, 즉 세례 요한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앞에 내세우는 것에 모든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증거자입니다. 증거자가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일 뿐이지 증거하는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산다고 할 때 우리의 시험은 항상 그리스도가 아닌 나 자신을 보이고 높이는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운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당연히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이 증거되고 사람이 높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사람의 교회로 전락한 모습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에게서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믿음으로 산다 해도 그 사람을 보지 마시고,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고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만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그리스도를 찬양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참된 증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안에서 외치시는 그리스도의 소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외치는 자는 다만 외쳐지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내가 외쳤으니까 외친 내가 너보다는 나은 사람이 아니냐라는 생각은 스스로 증인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외쳤다고 해서 증인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가 보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는 아니다라는 요한의 말이 곧 우리의 말이 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 대해서 관심을 두기보다는 무엇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인지에 더욱 깊은 마음을 두고 매일을 살아가는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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