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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늘 보좌

본문 / 4: 5- 9

 

1. 세상에서의 신자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신자들이 먼저 선한 행동을 하면서 모범이 되어야 그 영향으로 세상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교회라면 당연시하고 있는 상식과도 같은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면서 선한 행실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보자'고 하는 이것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바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말을 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교회로 인한 세상의 변화인가를 물어서 그 답이 내려지거든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과연 예수님이 그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물론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무슨 근거로서 이 말씀을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이 변화된 흔적이 있습니까? 아니 전혀 없었습니다. 세상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정체인 악만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이 아니셨다면 아마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는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위대한 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말씀을 세상에 내뱉었을 때 세상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성격적으로 부드러운 온유나,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손 같은 소위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인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가신 대로 오직 하늘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일은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을 통해서 계속 되어지고 있고, 자기 백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늘의 말씀이 선포 되어지는 것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선포 되어지고 말씀이 스스로 자기 백성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가 있고 신자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속에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한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구별되어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구별된 존재였던 나실인처럼, 세상과 온전히 구별된 분이었던 진정한 나실인인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별을 통해서 세상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이러한 신자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심판을 선포하는 모임이지 세상을 변화시켜서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단체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란 말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소금이란 짠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맛에 섞인다고 해도 짠맛을 드러냅니다. 만약 소금이 다른 맛에 섞임으로써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소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어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소금의 짠맛을 드러내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짠맛을 선한 행실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짠맛은 신자가 아닌 아무에게서나 발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한 행실은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나오는 뉴스만 봐도 도덕적인 선한 행실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자의 짠맛은 세상 사람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신자와 신자가 아닌 자가 그 짠맛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짠맛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으로 살아가는 자가 바로 짠맛을 드러내는 신자입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해서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빛으로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상은 빛으로 변화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고 합니다. 즉 세상은 빛 보다는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이기에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을 드러냈을 때 어두움은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3:20)라고 합니다. 결국 빛은 어두움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신자를 향한 세상의 반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어디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라든지, 선한 행동으로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고 교회의 이름을 드러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신자라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듣기를 싫어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반발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라고 살피려는 마음은 전혀 없이 '틀렸다'고만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반응들이 바로 말씀이 떨어지자 드러나는 어두움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두움이기에 빛을 싫어하는 악이 말씀에 의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 안에 살면서 말씀이 드러나고 있는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할 운명에 놓인 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 인간이 오히려 미움을 받는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도저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밀어붙이는 길이고 끌어가 주는 길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며 길인 것입니다.

우린 스스로 신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신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을 입은 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미움입니다. 세상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말을 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의 백성이 아닌 자는 이 길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찾아가게 됩니다. 물론 여전히 신자라는 이름과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말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것이 바로 교회가 아닌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한 것이 일곱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교회 아닌 교회는 빛을 싫어합니다. 짠맛을 싫어합니다. 세상과 동화 되어진 가운데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하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길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까? 미움이 좋아서가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늘을 본 자고 하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자입니다. 이미 영광된 것을 본 자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이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오늘 본문에서도 하늘 영광을 본 자가 나옵니다.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 보좌를 봤습니다. 무지개가 보좌에 둘리고 거기에 앉으신 분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그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오고, 보좌 앞에 일곱 영이 있고, 수정 같은 유리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는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목격한 하늘 보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요한이 본 것이지 내가 본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으로 지나쳐 버립니다. 다만 요한을 통해서 장차 우리가 죽어서 갈 천국에 이러한 보좌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본 하늘 보좌에 대한 말씀을 봐도 맹숭맹숭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여겨버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신자로서의 감격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오늘 본문의 장면을 요한만 본 것입니까? 에스겔서 1장에 보면 에스겔은 요한이 본 것보다 더 상세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것이 나옵니다. 또 이사야서 6장에도 보면 이사야 선지자도 성전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이미 구약의 인물도 하늘의 영광을 목격했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야 볼 수 있는 것들로만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실제로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개중에는 그 경험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아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라면 그 장면 앞에 엎드리어 죽은 자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네 생물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리 그러한 신자로 살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요한처럼 하늘 보좌를 목격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반문은 믿음이 전혀 없는 반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곧 우리가 본 것입니다. 우리가 볼 것을 미리 앞서 요한에게 보여주시고 요한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요한을 통해서 하늘 보좌를 미리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가 무엇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처럼 하늘에 올라간 자로 또 하늘에 앉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란 참으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은 이런 영광스러움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참으로 가난한 모습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미 하늘을 앉아 사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것 때문에 여전히 근심하면서 세상 것에 매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가난한 신자인 것입니다.

인간은 어둠의 존재입니다. 빛을 빛으로 여기지 않고 거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어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영원 전부터 주신 은혜대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신자된 것이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임의대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교회에 편지를 쓸 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것을 멸망의 자리에서 빼내 주신 은혜임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르심을 단지 교회 나오게 해서 목사 하게 하고, 장로 하게 하고, 집사 교사하게 하는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부르심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이 스스로 신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멸망의 자리로 보고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된 축복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도 가볍게 여겨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들을 희생시켰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는 말은 하지만 그 희생과 죽음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 희생시켰지만 결국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갔으니까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손해 본 것이 뭐냐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이 지금까지 계속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하늘에 가서 편안하게 계시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도 십자가의 죽으심도 모두가 과거의 일로 여겨버립니다. 과거의 고난이고 과거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예수님을 고난으로 밀어 넣은 자고 죽이는 자임을 전혀 생각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몸의 고난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몸의 고난이 아닙니다. 만약 몸이 고생한 것을 고난으로 여긴다면 사실 예수님보다 더 고생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적 고생이나 핍박을 고난으로 여겨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지만 이 땅에는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말씀이 곧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여전히 세상에 대해서는 감춰져 있고 비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에 의해서 여전히 말씀이 배척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도 계속 되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결국 신자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말씀 안에 사는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몸의 고생이 고난이 아니라, 세상이 알 수 없는 말씀 안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주님의 고난에 참예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 스스로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말씀 안에 있게 하심으로서 있게 되는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말씀을 알게 되면 예수님을 찌른 자가 바로 나 자신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을 때 자신이 신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이고, 놀라운 축복이며 감사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오직 말씀이 생명임을 잊지 않고 살 것이고, 그 무엇에도 말씀만은 양보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3. 그리스도의 위상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일곱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씀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듣고 싶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한 신자만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생명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하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쓰자는 것도 아니고, 하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서 하늘의 사람이 되었다면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만약 하늘 보좌를 본 사도 요한이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산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하면서 어떤 삶을 살 것 같습니까? 이것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살아갈 것으로 생각되는 그 삶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늘 보좌를 본 사도 요한이 세상에 다시 온다면 지금의 교회처럼 교회 부흥을 외치고, 선교를 외치고, 남북통일을 외치면서 살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성경에 나오는 요한의 삶에서 그러한 것이 보여졌어야 합니다.

하늘 보좌를 본 요한은 그리스도의 위상을 목격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위상은 요한계시록에서만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위상은 이미 창세기부터 전부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위상을 모른다면 결국 요한계시록을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고, 세상에 지는 자로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보다 세상에 매인 자로 살아가는 이유도 결국 그리스도의 위상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3절에 보면 무지개가 보좌에 둘렀다고 말합니다. 무지개는 노아 홍수 후에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증표였습니다. 그러나 물로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심판이 면제된 것이 아닙니다.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은 다시는 인간의 행위 때문에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행위에는 전혀 기대 걸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무지개가 보좌에 둘렀다는 것은, 이제 세상 심판은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심판 기준이 됩니다.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하늘 보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눈으로 못 봤으니까 모르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린 말씀을 통해서 지금 하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일은 이 땅에 그대로 연결 되어진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늘 문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온 세상이 지성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지 않는 모든 것이 곧 심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 곧 거룩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5절에 보면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보좌에서 나오는 말씀의 위상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말씀 자체가 이러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이 켜있는데 그것은 일곱 영이라고 합니다. 일곱 영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일곱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일곱 등불은 촛대가 일곱 개가 아니라 한 촛대에서 일곱 가지가 나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 영도 일곱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성령인데,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서 무엇이 어두움인가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본 하늘 보좌의 광경입니다.

우리는 앞에 1절에서 요한에게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결국 요한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 보좌의 광경을 봄으로서 세상의 실체가 어떠한가를 알게 되고 세상에 되어질 일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요한이 본 하늘 보좌를 보게 될 때 세상에 되어질 일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이고 마지막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이 심판이라는 것을 지금도 보좌에서 외쳐지고 있는 음성으로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하늘을 보지 못한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영광만 보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얻을 영광에 취한 채 하늘의 것을 무시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 그 무엇도 하늘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비교할 수도 없고 다만 쓰레기일 뿐입니다.

신자가 장차 누릴 영광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씀을 통해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이며 말씀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하늘 보좌를 통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으로서 세상에 매이지 않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하늘의 영광만 바라보고 살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래서 세상이 말씀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기죽지 마시고 당당하게 묵묵히 그리스도의 위상을 마음껏 펼치면서 살아가십시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신자의 빛과 소금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신자가 예수님를 본받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3.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신자를 향한 세상의 반응은 무엇이며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하늘에 앉힌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엇이며 또 그 부르심에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감사와 감격이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예수님의 남은 고난과 그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무엇입니까?

 

8. 우리가 하늘 사람이 도;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까?

 

9. 우리가 사도 요한과 같이 그리스도의 위상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까?

 

10. 노아의 홍수 때의 무지개는 무엇을 의미하며, 그 무지개가 하늘 보좌에 둘러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11. 하늘 보좌 앞에 일곱 등불과 일곱 영은 무슨 의미라고 합니까?

 

12. 하늘 보좌를 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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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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