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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데교회

본문 / 3: 1- 6

 

1. 신자의 기쁨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는 예수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좌우편에 두 강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만 집중하다 보니 당시 두 강도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당시 골고다 언덕에서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만 세워졌던 것으로 인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 왜 두 강도가 함께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안 하려고 합니다. 단지 사형수니까 우연히 예수님의 사형이 집행될 때 함께 포함된 것뿐이라고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 우리 생각처럼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고, 우리에게 생명이라고 하는 성경에 아무런 의미도 없이 우연히 되어진 일이 기록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현장에서 함께 사형을 당했던 두 강도는 무엇입니까? 과연 무슨 의미로 두 강도가 함께 등장을 하는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있는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말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53:12)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는 이 말씀이 십자가의 현장에 두 강도가 등장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는 것은, 다른 범죄자와 똑같은 범죄자로 판단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로부터 함께 있던 두 강도와 똑같은 범죄자로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두 강도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보십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 너무 과하게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강도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그들 사이에서 죽으신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39-43)고 합니다.

여기 보면 두 강도중 하나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23:39)는 말을 예수님에게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또 다른 강도는 그 강도를 나무라면서 “40.~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사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23:40-41)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두 강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면 너와 나를 구원하라'고 하여, 그리스도에게 능력과 힘이 있다면 그 능력과 힘이 자기가 살아나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강도는 '우리는 우리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즉 두 강도의 다른 점은 한쪽은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죽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에 있습니다.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본다면 자기 육신이 살아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두 강도를 통해서 세상을 자기 육신이 살고자 애를 쓰는 사람과 자기가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세계 안에서도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이 확실하게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강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란 말을 합니다. 나를 생각해 달라는 것은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뜻입니다. 이 강도는 자신의 육신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살아나야 한다거나 살고 싶다는 차원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 강도는 자신이 살아나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내 육신이 사는 것보다는 죄없이 죽는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는 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 강도에게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는 말씀을 합니다.

강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이었습니다. 강도가 구원을 위해서 한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실체를 알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용서를 유일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사람이 바로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에게는 당연히 세상의 부요함이 권세를 가진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10:20)고 말씀합니다. 신자에게 참된 기쁨은 귀신도 나에게 굴복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기쁨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2. 죽은 교회

오늘 본문은 사데 교회에 쓴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라고 합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살았다는 것은 뭐고 죽었다는 것은 뭐냐는 것입니다. 분명 육신이 살고 죽어 있는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흔히 교인들이 교회를 평가할 때, '이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다 또는 이 교회는 죽어있는 교회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평가의 기준은 자기들 마음대로 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살아있는 교회는 무엇이고 죽어있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의 차이를 성장하는 것에 둡니다. 즉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면 살아있는 교회고, 성장하는 것이 없으면 죽어있는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면 죽어있는 교회고, 부흥하는 교회면 살아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평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한 기준을 찾아서 그 기준 앞에 우리를 세우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하신 시각과 기준은 덮어 버린 채 오직 인간의 시각과 기준으로 교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활동을 많이 하고 부흥하면 그것을 살아있는 교회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사가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사람들의 눈에 살아있는 교회로 보여지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살아있는 교회로 보여지면 하나님도 역시 살아있는 교회로 보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교회가 살아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사를 만들게 되고, 교인들로 하여금 많은 활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살아있는 교회로 보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목사는 교회를 자기 기쁨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부모는 그 기쁨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식이 공부를 잘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즉 명분은 자식을 위한다는 것이지만 결국은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가 교회를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버릴 때, 목사는 자기 기쁨을 성취하기 위해서 교회를 목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명분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위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가 교인들보고 '내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말이 스스로 교주 되는 것이고, 이단으로 비춰질 수 있는 위험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라'고 하면 누구도 반발을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빙자한 자기 기쁨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하나님의 용서를 유일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를 기뻐한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유일한 기쁨의 대상으로는 삼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가 유일한 기쁨의 대상이라면 다른 것은 결코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것으로는 기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기쁜 일을 겪게 됩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기쁩니다. 집을 사게 되도 기쁩니다. 목사가 새 교인이 오게 되면 기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기쁨의 대상은 아닙니다. 세상에 기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되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령 부모가 자식 공부 잘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약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면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식 공부 잘하는 것에 목적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공부를 못하면 실망하고 낙심을 하게 됩니다. 자식을 대할 때도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를 기준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용돈을 달라고 해도 공부를 잘하면 잘 주지만 못하면 용돈 줄 마음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기뻐하는 것과 기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의 차이점인 것입니다.

목사가 새 교인이 오면 기뻐할 수는 있지만 새 교인이 오는 것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면 교인들로 하여금 새 교인을 데려오도록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기쁨을 성취하기 위해서 새 교인이 많이 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유일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뻐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기뻐하고 저것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라고 하는 이름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말할 뿐이지 교회가 진짜 기쁨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교회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았다고는 하나 죽은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3. 죽은 이유

사데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습니다. 사데 교회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만큼 부흥하는 교회였고 활동적인 교회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데 교회를 '죽었다'라고 평가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혼란이 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활동을 많이 하고 부흥한다고 해서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라면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라는 혼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인간의 행동에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살았다 죽었다의 기준은 인간의 행동에 있지 않습니다. 했다 안 했다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처럼 교인들에게 이것 해라, 저것 해라는 강요를 안 한다고 해서 죽어있는 교회도 아니고 또 그런 말을 안 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해서 옳은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뭘 하고 안 하고에 따라 교회다움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점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혼동해 버리면 사람들은 교회를 선전하게 됩니다. 뭘 하고 안함으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데 교회를 '죽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3:2)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게서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가 '죽었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에게서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행위의 온전함이 무엇입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온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지구상의 모든 교회는 '죽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신자니까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지 않는 것은 받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행위의 온전함이 없다면 그냥 우린 죽은 자일뿐입니다. 희망 없는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찾는 행위의 온전함을 도덕적인 행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547절까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을 이야기했고,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을 돌려대라는 것,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것 등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온전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에게서는 그런 행동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은 우리에게서는 절대로 보여질 수 없는 행위들입니다.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결국 인간은 온전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11장에도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십니다. 거룩이란 세상에서 벗어나서 세상과는 구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거룩해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이 아니면 거절하시고 심판해 버리십니다. 이것이 우리 실체입니다. 우리는 온전하지도 못하고 거룩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온전함과는 거리가 먼 행악자들입니다. 그래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죽어야 할 강도가 바로 우리 자신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도 곁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죄없으신 분,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이 죄인으로 헤아림을 입고 죽으신 그것이 곧 온전과 거룩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온전과 거룩을 예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온전함과 거룩을 요구하실 때 우리는 누구를 앞세우면 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편 강도의 심정이 되어서 '나는 행악자입니다. 나는 내 행위대로 보응 받아서 죽어 마땅합니다. 나는 이제 내 한 몸 사는 것보다는 예수님에게서 불쌍히 여김 받고 싶습니다'이것이 예수님만 의지하는 상한 심령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앞세울 때 그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온전한 자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데 교회에서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앞세우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보고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인해서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그것이 행위의 온전함이 없는 것입니다.

행위의 온전함이란 자신의 행위를 모두 악한 것으로 보고 오직 온전하신 예수님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행동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3)고 합니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잘나서 믿은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인데 끝까지 그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살지 못하고 인간의 힘을 앞세우고 인간의 재주를 자랑하고 자기가 잘나서 되어진 것처럼 여기는 그것이 바로 온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보고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는 심정으로 사는 자는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행악으로 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회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4. 살아있는 교회

그러면 진짜 살아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3:4)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합당한 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흰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죄용서를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주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 같이 희게 된다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용서를 유일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합당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에게 합당한 것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흰 옷을 입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한 용서하심만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사는 신자는 무슨 법을 하나하나 지키려고 할 필요가 없고, 따로 복을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복이 주어져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뭘 지킬 필요가 없고, 뭘 해야 할 필요가 없이 예수 따라 죽으면 모든 복이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해 주는 이름은 흰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용서를 유일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심말고 다른 것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고 사는 것은 흰옷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재주와 힘을 의지하고, 인간의 것을 내세우는 것이 흰옷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안 하고에 상관없이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했기에 '죽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함이란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유일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어 마땅한 자로 볼 수 있고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에게 합당한 모습이고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이 기록된 신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세상에 있으나 하늘을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이라는 이 놀라운 복을 누리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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