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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에베소 교회

본문 / 2: 1- 7

 

1. 교회

신앙인이란 죄를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규정하고 있는 죄를 깨닫고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가치를 두게 된 자를 가리켜서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인간의 의지와 열정과 이상과 환상 속에서 나오는 그 어떤 행동과도 연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철야 기도회라는 행동이 신앙과 연관이 없으며, 40일 금식기도라는 행동이 신앙과 연관이 없습니다. 믿음은 아예 행함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내포하고 있는 행함은 인간의 열정과 의지와 이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교회와 연관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교회는 분위기로 볼 때 신앙과 교회의 연관성을 단절하기란 매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상식은 신앙=교회입니다. 교회가 곧 인간의 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기준이고 현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가 신앙과 상관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 그것은 성경이 아닌 이상한 논리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교회가 돼버리면 자연히 교회에 모든 가치를 둘 수밖에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가 신앙과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전혀 묻지도 않고 다만 교회에서 열심히 하고 잘하면 신앙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고, 안 하게 되면 신앙이 없는 죄인으로 못 박혀 버립니다.

그래서 학생이나 청년들이 평소에는 그토록 교회에 열심을 내다가 진학을 하고 직장을 가지게 되고 결혼을 했을 때 교회를 나오지 않고 과거의 열심도 모두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이 교회라는 취미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더 재미있는 일을 찾게 되었을 때 교회라는 재미는 자연히 시들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교인들의 의식은 신앙=교회이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그리스도로 돼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같은 선에서 보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따라서 교회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신앙이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교회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주님의 몸된 교회만을 교회로 인정하고,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 즉 간판이 붙어 있고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교회를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인정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살피면서 계속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교회를 부인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를 통한 자기 꿈의 실현입니다. 특히 목사에게 있어서 교회란 자신의 꿈이고 이상이고 목표입니다. 교회가 곧 자기이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가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 그것은 곧 자신의 이름이 나는 것이고, 교회가 칭찬 들을 때 자신이 칭찬을 듣는 것이고, 자기 위상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통한 자아실현을 꿈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악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교회가 상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잘되는 것이 예수님이 잘되는 것이고, 교회가 칭찬 듣는 것이 곧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이 합법화되게 됩니다. 결국 교회가 하는 것을 방해하고 반발하는 자는 자연히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자로 낙인찍히게 되고, 교회가 하는 것을 돕는 자는 그리스도를 돕는 충성된 일군이 되는 것이 오늘날 교회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교회를 등에 지고 재물이나 눈에 보이는 부에 치중하면서 교인들에게 ''을 이야기하고 '헌금'을 강조하는 무리보다 더 위험한 것은 소위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복과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의로 생각하고,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서로 친절하게 지내고, 형제 같은 관계를 이루어 갈 때 그것을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으로 여겨버리는 것, 이것처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 좋아하는 교회를 교회 아닌 것으로 부정하기는 쉽지만, 돈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고 형제처럼 지내는 교회를 교회 아닌 것으로 부정하기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꿈꾸고, 많은 신자들이 원하는 '서로 섬기고 나누고 사랑으로 모이고 형체처럼 지내는 천국'같은 교회라는 것은 사탄이 제공한 또 하나의 유혹의 산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차원 높은 이상적인 요소로 가득 찬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욕구와 의지와 단결력이 그 동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러한 교회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시느냐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인간끼리 서로 같은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꿈을 품고 또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하나로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것을 교회로 본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까? 섬기고 나누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있습니까? 오히려 열두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는 그러면 안 된다. 섬기고 나누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서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백성'을 찾는 일에 참여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듣지 못하고 또 원하지도 않는 복음, 즉 예수님의 말씀만을 고집스럽게 전함으로서 예수님의 그 말씀을 목자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따라오는 자를 찾는 것이 교회의 일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 대신 죽었다는 것만 입버릇처럼 말할 뿐이지, 예수님이 나 대신 죽고 나를 살리신 것은 이제 내 인생을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내 인생은 예수님을 위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 즉 주님의 몸된 교회라면 교회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교회에 헛된 환상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상적인 교회라는 환상 자체를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으로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위한 인생에는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교회는 '자아실현'이라는 욕구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죽은 자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하니까 나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에게 간섭도 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되어야 하고, 내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이나 꿈을 앞세워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이 원하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뭔가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주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아무리 차원 높은 섬김과 사랑으로 모인다고 해도 역시 죄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완벽하게 보이는 이상적인 교회라고 해도 역시 죄인이 모여있는 것이지 의인이 모여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인간이기에 자신에게 기회가 되고 조건이 되고 상황이 갖추어지면 그 죄는 가차 없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차원 높았던 것처럼 보였을 이상적인 모습들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라는 것은 환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에 의해 세어진 인간의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교회만이 교회이고, 주님의 교회는 주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 관심을 둔 자들이 끊임없이 교회를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2. 바른 시각으로 보기

교회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보면서 '칭찬을 들은 교회''책망을 들은 교회'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이렇게 칭찬들은 교회'가 되자고 하거나 또는 '우리는 이렇게 책망을 들은 교회가 되지 말자'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는 아마 빌라델비아교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델비아교회는 책망이 전혀 없이 칭찬만 들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칭찬은 없이 책망만 들은 라오디게아교회는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은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등장하는 교회에서 칭찬들은 모습만을 추려내어서 우리도 이렇게 칭찬들은 교회가 되자고 말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왜 일곱 교회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일곱이란 숫자에 관심 두지 말고, 일곱이 의미하는 것에 관심을 두라고 했습니다. 일곱이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날로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의미의 숫자입니다. 즉 일곱 교회라는 것은 교회는 예수님이 만들어 내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가 발생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내어서 칭찬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은, 예수님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교회다운 교회는 오직 예수님께서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20)고 합니다. 여기 보면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합니다. 일곱 촛대 역시 촛대가 일곱이 아니라 촛대에 나와 있는 일곱 줄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결국 촛대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촛대를 일곱 교회라고 말씀한 것에 의해서, 일곱 교회를 일곱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만들어 낸 완벽한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친히 만들어 내시는 주님의 몸된 교회만이 교회이지 인간이 세우고 인간이 만들어 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한 교회 역시 주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 역시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간판이 붙어 있고 교단에 소속이 되어있고 사람들이 모여서 헌금을 하고 교회를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단지 바른 말씀이 전파되고 있다고 해서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만약에 바른 말씀을 전파함으로 교회가 된다면, 말씀에 관심이 없어도 그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주님의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람을 찾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전파되었을 때 그 말씀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몸인 것입니다.

교회로 모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속하여 다니는 교회를 부인하고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힘든 것이 내가 속하고 다니는 교회를 부인하고 교회로 모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나를 알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이지 우리가 속하고 다니는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가 속하고 다니는 교회를 부인하지 못하면, 우리가 속하고 다니는 교회에 소망을 두고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속하고 다니는 교회가 커지기를 기대하게 되고, 우리가 속하고 다니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속하고 다니는 교회가 우상이 되어 살아가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할 일은 내가 속하고 다니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4:11-12)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분명 목사를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무너뜨린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내가 속하고 다니는 교회를 무너뜨리야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교회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온갖 인간적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서 교회를 세워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는 지상에 있는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상의 교회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완전한 교회가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세우신 완전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것은 일곱 교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들은 모습을 모아놓으면 그것이 주님이 세우신 교회 모습이 됩니다. 그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아닌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마음

먼저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란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목사를 가르키는 말이 아닙니다. 사자란 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1:1)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어서 말씀을 지시하게 하셨습니다. 즉 천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위한 종입니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그러면서 2절부터 보면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2-3)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를 칭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잘한 것과 못한 것을 평가하기 위해서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교회다운 모습을 말씀하고 지상 교회의 현재를 고발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즉 교회다운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있는 존재로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를 향한 칭찬으로 이해해 버리면 결국 에베소 교인만을 높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칭찬을 들은 에베소 교인들의 행위에 중점을 두지만, 예수님은 에베소 교인들의 행위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칭찬을 하시는 것은 '에베소 교인들아 잘했다'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즉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사도가 아닌 자를 시험하여 드러낸 것을 칭찬하셨다면 그것이 곧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가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들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용납하지 않는 것을 우리도 용납하지 않고 있는가?'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사도 아닌 사도들의 거짓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마음과 같이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용납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칭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관심을 그들이 잘했다 또는 잘못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두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의 참된 교회가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거짓 사도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항상 목사를 시험해서 저 목사가 진짜이지 가짜인지를 드러내어야만 합니다.

흔하 말하는 것처럼 '목사는 주의 사자니까 잘못이 있어도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우리 같은 평신도가 심판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거짓된 교회, 교회 아닌 인간의 집단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주님이 원래 생각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항상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마음에 담고서 우리를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곱 교회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일곱 교회가 잘했다 잘못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래 생각하는 교회의 기준에 맞은 모습은 칭찬을 하신 것이고, 맞지 않은 모습은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대단하다'고 하지 말고 '지금 나는 주님의 교회의 기준에 맞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들은 것은 예수님의 기준에 맞지 않은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4)고 책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처음 사랑을 버린 모습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린 모습이 어떤 것이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예수님은 처음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지금 나에게 처음 사랑이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지, 어제 처음 사랑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오늘을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것으로 미래까지 보장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현재 지금의 내 모습을 물으실 뿐입니다. 어제의 신앙을 바라보지 말고, 오늘의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물으면서 사는 것이 주님이 기대하신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고 합니다. 촛대를 옮겨 버린다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한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우리교회는 교회다'라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우리들의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교회다. 교회 아니다'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판단 기준은 오직 주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일곱 교회가 칭찬들은 모습을 모아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 모습을 통해 현재 우리들의 실체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교회가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구제를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 선교를 하는가 안하는가, 열심이 있는가 없는가, 기도를 하는가 안하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인간이 세운 교회를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린 단지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과 타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2:6)고 말합니다. 니골라당의 행위가 어떤 행위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을 함께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미 그는 이긴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7절에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2:7)고 합니다. 이 말씀도 '이렇게 하면 생명나무 과실을 주겠다'가 아니라, 이미 생명나무 과실을 마음껏 따먹고 있는 완성된 상태는 이렇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완성된 자로 삽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 먹는 배부른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이 용납하지 않는 것은 나도 용납하지 않게 되고, 주님이 미워하는 것은 나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 먹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것, 이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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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2023 2월 5일 / (딛 1:1-4) 하나님이 맡기신 전도 관리자 2023.02.05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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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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