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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버가모 교회

본문 / 2:12-17

 

1.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인들 치고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입만 열었다 하면 '주님 내 가정에 함께 해 주시고, 내 직장과 사업에 함께 해 주시고, 내 교회에 함께 해 주시고'를 남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그 간절함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는 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가정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가정이 평안하고 좋지 않은 일들은 근접하지 못하고 항상 좋은 가정이 유지될 것 같은 기대감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속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예수님 덕분에 주어질 혜택이 더 좋아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효능이 있다고 하는 부적을 하나 붙여 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함께 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이 자신에게 좋은 일을 몰고 오는 분이 아니라면 함께 하고 싶을 이유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마치 자식들이 돈 많은 부모를 서로 모시겠다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습니다. 돈 많은 부모를 서로 모시겠다는 것은 부모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돈이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에게 잘 보이면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돈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예수님 때문에 주어지는 혜택에 더 눈독을 들이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확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좋은 신자는 다른 것에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사람들입니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 죽음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진심으로 예수님만 사랑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세친구가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풀무불에 들어가게 된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들어갈 때는 분명 세 사람이었는데, 풀무불 안에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즉 주님이 다니엘 세 친구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다니엘 세 친구가 풀무불에서 구출 받았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주가 함께 하시면 어떤 난관도 고통도 어려움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니엘 세 친구는 주께서 자신들을 구출해주실 것을 믿고 마음 놓고 풀무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단지 주만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가 아닌 다른 것에는 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설사 자신들이 불에 타 죽는다고 해도 주 외에는 다른 것에 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조차도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7-18)라고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들이 풀무불에 던짐을 받아도 하나님은 자신들을 능히 건질 능력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만 보면 다니엘 세 친구가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고 풀무불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뒤에 보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볼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풀무불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을 기대하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풀무불도 마다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으니까 우리를 분명히 건져 줄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전혀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건져주지 않는다고 해도 절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건져 줄 것을 기대하고 행동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풀무불도 서슴없이 들어가는 행동조차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풀무불에서 능히 건지실 수 있는 분이 건지지 않는다면 풀무불에 타 죽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냐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와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에는 어떤 기대도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좋아서 주님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만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그 사랑이 흔들리지 않고 끊어지지 않습니다. 설사 주님 때문에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주께서 하신 일임을 알고 기쁘게 죽는 것이 바로 주님만 사랑하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진심으로 주님만 사랑하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길은, 나에게 있는 세상의 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갈 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많을 때는 내가 주님만 사랑하는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나갈 때, 진짜 주만 사랑하는 신자라면 세상 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사랑이 흔들리거나 끊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과연 주님만 사랑하는지가 확인 되어지는 것입니다.

 

2. 신자란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2:13)라고 합니다.

당시 버가모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가이사를 섬기기 위한 신당들이 세워졌고 '가이사가 주다'라고 고백할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본문에서는 사단의 권좌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란 사람이 주님께만 충성한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무슨 일로 죽임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디바는 가이사에게 굴복하지 않고 주님께만 충성하고 주님만 사랑하는 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예수님이 칭찬하신 내용입니다.

일곱 교회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일곱 교회에 대한 내용에서 주의할 것은 교회 자체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을 받았구나. 우리도 저렇게 해서 칭찬받는 교회가 되자'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칭찬하신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책망하신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는 오늘날 우리 모두를 고발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버가모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 참된 교회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주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두려움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믿음 때문에 죽는 자를 친히 목격을 한다면 보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큰 두려움으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마음을 다른 무엇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즉 주님의 사랑이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5-39)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마음이 다스림 받고 있는 신자는 세상의 보이는 것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몸된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만 사랑하는 교회는 보이는 것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예수' '예수' 하다가도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가 부러워지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을 보면 그것이 부러워지는 것은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믿음도 없고, 하나님도 안 믿는 자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이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를 확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21:15)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물으신 것은 '그동안 성경 많이 봤느냐?' '그동안 잠안자고 기도 많이 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질문을 세 번 하셨을 뿐입니다.

마지막 때 천국갈 자는 주님만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께 대한 우리들의 사랑을 확인하라고 우리들의 눈에 나보다 못한 자가 더 잘 살고, 나보다 믿음도 없어 보이는 자가 부자 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나사로같은 사람이 있게 하심으로서 '평생을 거지로 살아도 좋으니까 주님의 사랑만 내 속에 꽉 찼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이는 교회는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고, 내 집과 내 교회를 더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으로 사는 자는 보이는 것 때문에 얼마든지 믿음을 저버리는 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3. 거짓 교회, 참된 교회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2:14)는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참된 교회가 아닌 모습입니다.

발람은 구약 민수기에 나오는 사람으로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인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자 모압의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해도 되는지 하나님께 묻겠다고 했고, 하나님은 '저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압의 발락은 많은 금은보화와 사신을 보내서 다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럴 때 발람은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 물어보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미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묻겠다는 것은 결국 사신들이 가져온 금은보화에 마음을 뺏겼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에 굳게 서서 발락의 요청을 거절해야 옳습니다.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왔다고 해도 발람의 속에 말씀이 살아 있다면 다시 물어보겠노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묻겠다는 것은, 발람의 마음이 이미 돈에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발람의 교훈이라고 합니다.

방금 읽은 14절에서 이스라엘이 발람의 교훈을 지켜서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었다는 것은, 그 당시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행음하라. 우상 제물을 먹으라고 가르쳤고, 이스라엘이 그 말대로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세상의 좋은 것 때문에 말씀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한 증거이고 그것을 발람의 교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5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2:15)고 합니다. 요기 보면 발람의 교훈을 니골라 당의 교훈이라고 말합니다. 니골라 당이 어떤 당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같은 것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니골라 당은 발람과 같이 겉으로는 말씀을 중요시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에는 세상을 향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의 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2:16)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적으로 드러난 자들이 바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도 보면 버가모 교회에 편지하시는 예수님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검이란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싸우시고 심판하시는 원수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원수된 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마음을 보이는 것에 빼앗긴 채 살아가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원수된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 삼아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교회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천국도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해 버립니다. 이미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보다는 보이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있기 때문에, 그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리할 수 없고 그래서 보이는 것을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나, 봉사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가르치는 모든 것들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주님의 사랑을 대신하려는 니골라 당의 교훈이라는 것이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구별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참된 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잘못된 것인 줄 알고 오직 주님의 사랑만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2:17)고 합니다.

이기는 자들에게는 만나, 즉 하늘의 말씀을 주시고, 흰 돌을 주신다고 합니다. 흰 돌은 깨끗한 돌을 의미합니다. 그 돌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름은 흰 돌을 받은 자만 안다고 말씀합니다. 흰 돌에 쓰여진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돌을 받은 자만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알게 한 자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진짜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느냐?'라고 물으면, 교회에 다닌 자라면 대부분 누구라도 '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한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니골라 당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대적이며, 원수된 모습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를 알게 하셨을 때 자연히 구분되는 것이 바로 니골라 당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바로 우리에게서 발견 되어집니다. 예수님의 대적으로 원수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나 자신에게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내 믿음으로, 내 의지로, 내 생각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정작 나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의 대적이요 원수된 모습이 발견 되어질 때 애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회개하면 구원시켜 줄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참된 교회는 회개로써 드러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된 축복은 물론 천국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이 왜 그리스도의 원수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원수된 모습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와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흰 돌을 받은 자이고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한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죄를 알고 무엇이 그리스도의 원수된 모습인지를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기뻐하십시오.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죄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는 보이는 것에 매어 있음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보이는 예배당 건물에 매어 있고, 교인 수에 매어 있고, 돈에 매어 있는 모든 것들이 죄를 모르고 니골라 당을 모르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원수이면서도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 덩어리인 내가 죄를 안다는 것은 이미 주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임을 아시고 그 은혜로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것으로 감사하고,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이긴 자로서의 신자의 모습을 마음껏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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