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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본문 / 1: 1- 5

 

1.무질서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업도 질서가 아닌 무질서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의 기준을 두고 그 기준을 향해서 일관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기준이 존재하고 서로 자기가 세운 기준이 맞다고 우기면서 자기의 기준을 따라오지 않으면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맞다 틀리다의 싸움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것입니까? 누군가가 이것이 맞다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그래 이것이 맞네라고 동의하겠습니까? 분명 어느 한쪽에서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이것이 맞다라고 다른 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치에서 야당이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여당이 하는 것이 옳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각 지방에 따라 다를 것이고 사람의 감정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답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무질서라고 한다면, 질서란 하나의 기준이 존재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기준을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면 그것이 곧 최고의 질서입니다. 옳고 그름의 답도 항상 일관되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답으로 통일되어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서의 나라를 살아가려고 한다면 하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기준을 버리고 그 하나의 기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질서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기준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고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태초란 천지창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고 말씀합니다. 똑같이 태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의 태초와 창세기 1장의 태초는 서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장의 태초는 말씀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처음부터 이미 말씀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의 존재에 처음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씀의 존재에 처음이 있다면 그 처음을 있게 한 또 다른 존재를 말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말씀 역시 창조되어진 것으로 이야기 되어져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은 여기 계시니라라는 단어를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3인칭 단수 미완료형 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말씀이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한은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것과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고 하여 만물은 말씀에 의해서 지은바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에 의한 시작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만물은 말씀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다면 분명 만물이 지어진 의도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음받은 이 세상에 세워진 단 하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바로 세상이 지향해야 할 단 하나의 기준이며 이 기준을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곧 질서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벗어난다면 질서의 나라가 무질서의 나라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은 바로 이 하나의 기준을 벗어난 무질서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씀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말씀 아래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질서이며, 그 말씀을 벗어난다면 그것은 곧 무질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왜 말씀을 지향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본문 4절부터의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4-5)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만물이 말씀에 의해 지음을 받았을 때 만물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세상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처음 상태였습니다. 생명이 있었기에 빛이 비취면 빛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향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생명은 단지 오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그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곧 생명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가 곧 질서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의 모든 행동과 방향이 한 분의 뜻과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처럼 제대로 된 질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그러한 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말씀 아래 존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존재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과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오로지 자신의 뜻과 기쁨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결국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기쁨을 위해서 선악과를 먹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현상은 빛이 오되 빛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입니다.

 

2. 세상의 실상

요한이 요한복음의 처음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되어진 맨 처음의 세상은 생명과 빛이 있는 세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을 깨닫는 세상이었는데, 그 생명을 잃어버리고 빛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요한은 세상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요한복음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이 어두움이라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심으로 사실로 드러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말씀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고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의 모습입니다. 빛이 왔으되 빛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단지 세상은 어두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두움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끝나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빛을 잃어버린 세상에 다시금 생명과 빛이 있는 나라를 만드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 다른 점은 바로 생명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에서 말씀하는 생명은 하나님만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곧 생명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신자라는 증거는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생명 되신 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란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생명이 주어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빛이 오되 빛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였는데 빛을 알 수 있는 지혜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 있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삶의 기준이며,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는 것이 곧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의 나라입니다. 생명 되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고 주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생명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눈이 뜨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주어진 참된 복이며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물에 또 다른 것 무엇을 덤으로 얹어 주시지 않습니다. 이미 최고의 선물을 주셨기에 뭔가 보충해야 하는 또 다른 선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최고의 복을 얻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라면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을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고 또 깨달을 수 없는 생명 되시고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데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인 생명을 담을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우리의 인생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하나하나가 생명이 보여지고 증거되는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것을 담으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질서의 나라를 무질서의 나라로 바꿔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자기 백성에게 주실 것을 이미 결정하고 오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나라가 곧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원하는 것을 따로 간직한 채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것이 불신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 앞에서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이미 주신 것으로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또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의 할 일이란 예수님이 주신 생명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빛의 자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안에 생명이 있음으로 기뻐하셨다면 오늘날 역시 생명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신자된 자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신자가 많은 일을 해서가 아니라 신자에게 있는 생명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으로 감사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돈 없는 자신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돈 없는 자신이 보일 때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한숨이고 자신에 대한 실망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것밖에 주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돈 많은 자가 눈에 보일 것이고 또 그런 그들이 부럽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자신은 불행한데 그들은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질 뿐입니다.

자신을 볼 때 남들보다 없는 것을 보지 마시고 남들에게 없는 것이 주어진 자신의 복됨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두운 세상이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있고, 어두운 세상에 없는 생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것은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았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생명이 있는 자라면 생명의 귀함을 알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하늘에서의 자신의 모습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을 사는 것이며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잃어버리고, 누리지를 못하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처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으로 염려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말하되 생명의 복됨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암에 걸리고 죽을병에 걸린 사람만이 시한부 인생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시한부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든 인간은 죽습니다. 다만 시간의 차이일 뿐이며 그 시간의 차이라는 것은 극히 미미한 차이입니다. 영원이란 시간 앞에서 생각한다면 몇십 년이란 순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시한부 인생에서 인생의 종말을 두고 생각한다면 소중한 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늘의 삶으로 이어가게 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을 지금부터 소중히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시고 고난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받아 누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은 어두움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에 오직 생명만을 남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만 두시고 나머지는 모두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두고 생각한다면 생명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심판에서 건짐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에서 건짐받은 증거가 곧 생명과 빛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신자된 우리가 세상에서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속한 것의 결국은 사라질 것들입니다. 물론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필요하다는 것은 단지 있으면 편리하다는 의미로만 봐야 합니다. 돈이란 있으면 있을수록 사는 것을 편리하게 하고 편하게 하는 것이지 돈이 곧 생명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 역시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을 즐겁게 하고 쾌감을 누리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권력이 생명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돈과 권력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도 않으며 또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인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러면 우리가 진정으로 주안에서 복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할 것은 오직 생명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아닌 것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우리를 지킵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자는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본래의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함으로 어둠에 속하여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본래의 창조물을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는가 하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생명이 주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빛을 보고 깨닫는다는 것은 그는 이미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 여기에 우리의 모든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어둠의 자식이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빛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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