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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본문 / 1:11-20

 

1. 교회에 대한 착각

세상 속에서 교회란 어떤 역할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 속에 교회를 세우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아직까지 부름받지 않은 백성을 찾기 위해서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참된 교회의 역할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시록 시작할 때 세상 속에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세상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를 드러낼 수 있는 구별의 모습이 이스라엘에게 없을 때 이스라엘은 자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세상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역할을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옛날 불교처럼 속세와 담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살아가는 정신과 구별되게 사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즉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잃어버릴 때 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가 세상과 다른 구별된 모습이 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재정의 많은 부분을 이웃을 돕는 구제에 쓰고, 선교를 하고,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교회일 때 그것이 교회다운 교회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래서 뭔가 생각이 있고 뜻이 있다고 하는 목사들이 외치는 교회 개혁이라는 것도 교회가 사회에 눈을 돌리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대형화가 되어 오직 자기 살찌우기에만 바쁘면서도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을 외치면서 '이제는 교회도 눈을 자기에게만 두지 말고 사회에 돌려야 할 때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교회가 예배당 짓고, 교육관 짓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돈을 소비할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정성으로 들어온 헌금을 좀 더 뜻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평소 교회가 '돈돈'하는 것에 식상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란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고쳐지고 변화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예수님이 교회를 고치고 다듬고 변화시킨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교회를 다듬고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교회란 주님의 몸을 말합니다. 우리가 속한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칼빈의 교회관, 즉 교회를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와 보이는 유형 교회로 구분을 하고, 무형교회는 죽은 자들이 하늘에서 이루고 있는 완전한 교회이고, 유형 교회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들이 모이는 완전치 못한 교회라는 것은 성경을 비추어 볼 때 잘못된 말입니다.

교회에 대한 칼빈의 의견은 세상에 세워진 교회에 대해서 포기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지상에 세워진 교회도 교회로 인정을 해야 하는데, 그 속을 보면 죄는 여전하고 교회라고 해서 추악하고 더러운 면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형교회 유형 교회로 구분을 해서 유형 교회는 얼마든지 개혁하고 고쳐갈 수 있는 것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했을 때, 무형교회가 주님의 몸인지 유형 교회가 주님의 몸인지 과연 어느 것을 주님의 몸이라고 해야 할지에 대한 곤란함이 발생합니다. 결국 교회를 둘로 구분을 해버리면 여러 가지 모순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교회를 둘로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몸 된 교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교회는 고쳐야 하고 개혁해야 할 부분이 있는 미완성된 교회가 아닙니다. 완전한 주님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에 고치거나 개혁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개혁하고 고치신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고치시고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것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몸 된 교회를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지체인 그 백성들을 주님의 교회에 맞게 고쳐 가시고 만들어 가시는 것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개혁이라면 맞습니다. 즉 교회가 고쳐지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에 의해서 고쳐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의해서 고쳐진 자들의 모임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많은 분들이 교회를 인간이 고치고 만들어 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인간의 책임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으로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보완되고 고쳐져야 할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개혁하자고 하면서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의 모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하면 무엇을 연상합니까? 건물이 마련되어 있고, 강대상과 장의자가 놓여 있고, 교회 간판이 붙어 있고, 목사가 있고, 장로님이 있고, 주일 되면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그런 것을 교회라고 연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개혁'이라고 하면 현재의 모습에서 좀 더 나아진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즉 지금도 교회이지만, 좀 더 나은 교회가 되는 것이 곧 교회 개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면 너희는 교회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번 교회가 영원히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속한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생각해 버리면 우리가 속한 교회에 다니는 나는 참된 교인이 돼버립니다. 참된 백성이 모인 것이 참된 교회이지 참된 교회에 들어감으로서 참된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님을 머릿돌로 하고 사도들을 기둥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도들은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핍박을 받았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머리로 한 참된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의 모습에 들어맞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 앞에서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자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개혁해야 할 것은 주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의 모습에서 너무나 멀어져 있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이 과연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모습에 들어맞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 교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항상 있어야 함에도 사람들은 '내 교회는 진짜 교회다'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리고 오직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목회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입장과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존재케 하신 목적을 벗어난 것이기에 하나님의 원수 된 것이 교회 안에 있음을 모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관심을 두는 것은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를 꿈꾸고, 교회가 서로 모여서 원만한 친목 단체를 이루어 가는 것으로 교회 되었다는 만족감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인 것입니까?

 

2. 성경이 말하는 교회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1:13)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촛대가 무엇입니까? 이 촛대는 구약에서 성전 안에 위치해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20)고 말씀함으로서 분명히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촛대는 성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촛대가 촛대 될 수 있는 것은 성전 안에 위치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럼 뭐가 성전이냐는 것입니다. 엉뚱한 성전 안에서 '내가 촛대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전이 성전 될 수 있는 것은 언약궤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촛대가 놓여 있는 배후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의 중심도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없는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즉 성전 되는 조건은 인간의 손으로 웅장한 건물을 지어 바치고 온갖 멋진 장식과 경건미를 다 만들어 내도 단 하나 언약궤가 없으면 성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인간의 구원을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계시록의 중심은 언약궤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1장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11:19)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보이는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다른 말로 하면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어긋난 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조직체의 교회로 상상하면 안 됩니다. 교회를 조직체의 교회로 상상하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서 본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느니, 제도를 개혁하고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직을 구축하고 그 조직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조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조직을 효과적으로 구축해야 교회가 발전하고 교회가 튼튼해지고 유지된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인간의 힘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에 '촛대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읽은 13절에 보면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를 돌아다닙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가랴 4장을 보아야 합니다. 스가랴서 4장에 보면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4:2-3)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등대가 있고 그 좌우 곁에 감람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성전은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게 되어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성전은 반드시 인간이 세운 성전을 공격하고 심판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6절에 보면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이 말씀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따라서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모두가 다 가짜라는 것이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결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다니신다는 말씀을 스가랴서를 배경으로 해서 해석할 때, '교회는 주님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세우신 교회와 인간이 세운 교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인자 같은 이'라는 말씀에 알 수 있습니다. 인자 같은 이는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인자가 곧 고난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817절에 보면 다니엘을 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다니엘이 고난받은 자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다니엘 자신의 힘이 아니라 다니엘과 함께 하고 있는 다른 한 분 때문이었습니다. 그 다른 한 분이 드러난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풀무불 속이었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풀무불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도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다른 한 분을 바라보고 살아갔었고 그 한 분만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풀무불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함께 하는 다른 한 분만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한 분 때문에 고난도 핍박도 마다하지 않는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말씀드린 것 같지만 결론은 간단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의미하는 것이 일곱 촛대입니다. 일곱 촛대라는 것은 촛대가 일곱 개라는 뜻이 아닙니다. 촛대에 보면 가지가 일곱이 있습니다. 촛대 자체는 하나이지만 가지가 일곱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일곱이지만 하나라는 것이 촛대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일곱이란 숫자의 의미, 즉 일곱은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의미의 숫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를 교회가 일곱이라는 숫자적 의미로 연상하지 마시고, 참된 교회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다는 의미로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3. 참 교회

오늘 본문 앞에 11절을 보면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1:11)고 합니다.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셔서 책망을 하시기도 하시고 칭찬을 하시기도 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오늘날 많은 설교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책망하신 이러한 모습을 버리고 칭찬 받은 모습을 가짐으로서 참된 교회가 됩시다"라는 식의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전혀 알지 못한 말입니다.

일곱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책망과 칭찬은, 책망을 통해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고발함으로서 하나님께 칭찬 듣는 그 모습이 바로 참된 교회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보고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러한 교회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힘과 수단과 노력과 도덕과 윤리를 동원해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려고 할 때 백이면 백이 어떤 모습의 교회를 상상하게 됩니까? 바로 사랑이 넘치는 교회,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빙자해서 인간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 구제나 환경운동 같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고 본이 되는 이런 것들을 참된 교회의 기준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심으로써 인간이 세운 교회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는 오직 예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약속을 품고 있습니다. 오직 말씀이 관심일 뿐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교회이고 말씀에서 어긋나면 교회가 아닙니다.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교회는 교회답다'는 생각은 버리고 '우리 교회가 말씀을 따라가는 자로 모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인간이 교회를 만들겠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교회, 바른 교회, 이상적인 교회, 이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한 교회, 바른 교회, 이상적인 교회는 그저 말씀을 따라가는 교회입니다. 말씀에만 관심 두고 주님을 따라가는 그 교회가 가장 아름다운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8)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왜 살아나셨습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모든 일을 주님이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아닌 것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촛대 사이를 다니면서 교회 아닌 것은 다 잘라내고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태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말씀에 관심이 없는 교회들은 소위 좋은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항상 고민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을 흉내 내고 도입하고 가르친다고 해도 인간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우린 단지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그분께서 모든 일을 다 하고 계신다는 것만 믿고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용납하지 않은 것은 우리도 용납하지 않고, 예수님이 기뻐하신 것을 우리도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싫어한 것을 너도 싫어했으니까 잘했다'는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 때문에 지옥 가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기들 스스로 의로운 일을 열심히 해서 교회답게 돼보려고 하고, 의를 쌓으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 것입니까?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항상 우리들 스스로 쌓으려는 의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이 시간 나의 의를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신자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신 결과임을 알고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신 개혁입니다. 이 개혁의 현장에 주의 통치와 다스림을 통해 우리가 쌓은 바벨탑이 철저하게 무너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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