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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빈 무덤을 찾는 사람들

본문 / 24: 1-12

 

1. 빈 무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장사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24:10)고 밝히고 있고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확인한 것은 예수의 시체가 사라지고 없는 빈 무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23:55)라고 하여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할 때 뒤를 따라가 무덤과 예수님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 확인한 사람들입니다. 즉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가장 사실적으로 확인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예수님이 시체가 있어야 할 무덤에서 시체를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인들은 본문 4절의 말씀처럼 있어야 할 시체가 없는 것으로 인해 근심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체가 없어진 것이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단지 누군가가 시체를 가져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앞에 누가복음 23장에서 마리마대 요셉을 뒤를 따라가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한 여인들이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23:56)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준비한 향품과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대인의 장례법에 의해 향유로 시체를 씻고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예수님을 제대로 장사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53절에 보면 그러한 절차 없이 예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그냥 장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의 여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장사하기 위해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한 요셉이나 예수님의 시체를 제대로 장례하기 위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으로 찾아간 여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에 대한 정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활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 그들이기에 이미 요셉이나 여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죽은 존재일 뿐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따라서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 아무 희망도 기대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소망하는 것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인간의 정성은 결국 정성을 보인 인간의 행위만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나 여인들의 정성에 초점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정성을 보인 이들이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돌아가 버린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알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채 예수님을 죽은 자로 간주한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살아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무덤에 시체가 없는 것 때문에 근심하는 여인들에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자들이 얼굴을 땅에 대며 두려워하자 두 사람이 “5.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24:5-7)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하게 소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적 사건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처럼 중요한 것이 부활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을 좀 더 상세하고 극적으로 다루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보여주었다면 부활은 좀 더 사실적인 분위기로 전파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활의 과정 등에 대하여 모든 것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부활과 같은 위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슬픔과 근심과 두려움과 혼란 등의 분위기에서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24:6)는 말로 시작할 뿐입니다.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여인들은 그들의 말을 확인도 하지 않고 돌아가서 그 모든 일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알립니다. 이것을 보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인들은 두 사람의 말만 듣고 죽은 예수님이 살았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8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24:8)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고 그 사실을 사도들에게 전하는 과정을 보십시오. 활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믿고 전하는 그 일에 소위 신비적인 사건이나 현상이나 체험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도 않았습니다.

두 여인이 살아 나셨느니라고 했을 때 보편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이 정말이냐?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았냐?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라고 하면서 부활의 예수님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들에게는 그러한 확인 과정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인들에게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가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기에 여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즈음에 소위 교회 성장에 대하여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를 여러 방법을 동원하게 되면 교회가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여러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교회 성장에 효과적인 프로그램 같은 것입니다.

효과적인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것에는 교인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확신을 갖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말씀만으로는 안 되고 보여줌으로써 확신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기독교의 여러 방법론이라는 것은 기독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를 더 큰 위기에 봉착하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의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죄인 됨을 알게 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죄인 됨을 알게 하셔서 인간들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예수님만을 의지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인간이 그 죄를 알고서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보고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우리가 받고 누리는 은혜와 사랑과 구원의 가치가 우리에게 크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하는 것은 말씀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됩니다.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부활은 허탄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들의 말을 들은 사도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1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24:11)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기뻐하고 믿어야 할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이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을 때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시체가 없고 세마포만 있는 것을 보고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여자의 말을 듣고 무덤에서 확인한 것은 시체가 없는 빈 무덤이라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보지 않아도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인 것입니다.

 

3. 말씀에 의한 믿음

여인들이 두 사람에게서 들은 말은 그들이 예수에게서 듣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미 예수님께 들은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여자들에게 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7절에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24:7)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이 예전에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확인했으면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는 말씀이 기억났을 법도 하고, 그렇다면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까지 기억했을 것인데 전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말씀을 들었고 그 들은 말씀대로 되어지고 있는데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현실에 빠져 절망에 갇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성경을 통해 수많은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에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재림과 세상의 끝에 대한 말씀도 기억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무덤에서 시체가 사라졌다는 현실에서 부활에 대한 말씀은 잊고 근심하고만 있는 여인들처럼 말씀을 안다고 하는 우리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하는 것이라곤 불안과 염려와 근심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말씀이 하는 일은 우리가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말씀이 증거 하는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을 전하는 여자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목격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자기 이야기를 보충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듣고 기억한 말씀을 전한 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말씀의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의 경험이나 신비한 체험, 인간의 지식으로 확인하고 인식되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만으로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인식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세계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4. 산 자와 죽은 자

두 사람이 여자들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24:5)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자들은 무덤에서 죽은 예수를 찾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말은 무덤, 즉 죽은 자의 세계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계는 죽은 자의 세계가 아니라 산 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여자들은 무덤에서 예수를 찾았지만 사실 무덤에 있을 자는 바로 여자들이고 우리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야 하고 무덤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죽은 몸으로 계셨던 것은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사셨고 부활의 주로서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무덤을 찾으면서도 그 무덤이 바로 자신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예수를 찾아온 것도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자를 장사지내주는 차원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정작 죽은 자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한 달 뒤, 일 년 뒤라는 시간적인 차이일 뿐 죽음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면서도 죽음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고만 생각합니다.

이처럼 자기 죽음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예수를 찾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자들처럼 예수님을 위해 자기 정성을 나타내는 것 아니면 세상에서 살기 위해 예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게서 죽음을 초월한 새로운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도움을 구하는 그것이 곧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삶에 묶여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실존을 세상의 삶에서 실감합니다. 돈 없으면 무시 받고, 실력이 있어야 출세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조건들이 충족되는 삶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충족들이 우리를 얼마나 기쁘게 해 주고 행복한 삶이 되게 하겠습니까? 결과적으로 그러한 조건들은 모두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무덤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존이 무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현재의 삶만 생각하기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사람은 찬란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어떤 상태의 옷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자들이 입고 있던 옷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화려하고 비싼 옷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입을 수 없는 옷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찬란한 그 옷이 다시 사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혀주실 옷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사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신자는 세상이 주는 옷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뜻을 두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생명이라는 찬란한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는 부활의 세계라는 것을 말씀으로 깨닫고 기억하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삶에 묻히게 되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이야기는 나와 상관이 없는 막연한 내용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얼마나 기억하고 사십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삶에 힘으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과연 부활 때문에 위로받고, 기뻐하게 되고, 하늘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바로 무덤을 찾은 여자들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이 말씀을 기억함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않았음에도 부활을 믿으며 사도들에게 달려간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항상 들은 주의 말씀이 생각나고 기억나게 되어서 그 말씀으로 인해 우리 가운데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시기만을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지금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 인간의 실존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분이 누군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기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소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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