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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본문 / 2: 8-14

 

1. 인간의 복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라고 하여 우리가 너무나 좋아하고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고 하는 같은 의미의 말씀을 세 번이나 하였으니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이라 여겨 우리가 좋아하고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악한 아비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도둑놈도 사기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이 좋은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 것입니까? 내가 산 아파트 가격이 오르거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승진하거나 또는 내 사업이 잘되는 것 같은 것일 겁니다. 이 좋은 것을 하나님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같은 내용의 말씀을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하여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는 좋은 것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1-1)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고 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35절에도 보면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1:35)고 하여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며 또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처녀인 마리아가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그 당시 처녀인 마리아에게는 죽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은혜 받은 자에게 또 성령의 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난한 나사렛의 마리아가 언제 한 번이라도 처녀로서 아이를 가질 생각을 꿈에라도 꾸었겠습니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기에 거저 착실한 남자 만나서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과는 정반대로 처녀가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죽을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누가복음 1장 46절 이하의 마리아의 찬양을 보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낮고 낮아지셔서 비천한 계집종의 몸에 오심으로 자신이 죽게 되었음을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수 있음에도 이런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환경과 소원과 상관없이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며 역사인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성령이 충만하여 태어나지도 아니한 아기 예수를 내 주라고 고백합니다. 사가랴는 벙어리 된 입이 열리면서 주님을 찬송하는데 죄 사함으로 인한 구원,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이 비취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오늘 말씀처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자기들이 평소에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쁨의 소식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이라고 복된 소식이라고 기쁜 소식이라고 전하는 것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8-10)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면서 그 다른 복음을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도 사람을 좋게 하는 내용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좋게 하는 내용이 없는 하나님의 참 복음은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 기뻐하고 좋아할 내용인 것입니다.  

 

2. 참 복음
오늘 본문을 보면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눅2:1-2)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구조사란 왜 하는 것입니까? 징병과 조세를 위한 것입니다. 

그때의 로마 황제가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이고, 수리아 총독은 구레뇨입니다. 이때는 세상을 로마가 정복하고 지배한 시대입니다. 이런 로마의 황제의 영으로 호적 하라는 명이 내려진 것입니다.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라서 베들레헴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호적조사에 임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마리아를 함께 데려온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하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결혼식도 하지 않았는데 배가 불러오는 마리아가 친정에선들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하다가 천사가 나타나 알려줌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신세도 버려놓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적인 전통을 지키지 못한 속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명령에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황제의 명령으로 인하여 호적 하러 베들레헴으로 온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로마의 황제란 단지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 예언이 미가서 5장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고 합니다. 

이 미가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시기 전 이미 700년 전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헤롯 왕 때에 아기 예수를 경배하려고 온 동방박사들이 왕이 어디에 태어났는지를 물었을 때에 서기관들이 정확하게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는 것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도 하나님의 도구이고 요셉과 마리아도 하나님의 도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도록 명령한 헤롯도 도구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묵시가 역사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아는 사람은 소경인 것입니다.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2-1)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부터 보면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눅2:3-4)라고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왔는데 해산할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을 구하여도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참 가난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이 많았다면 여관 주인에게 말하면 안방이라도 내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한 젊은 부부에게 선 듯 방을 내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선 찾은 곳이 짐승들의 우리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는데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짐승이 태어나는 우리에서 태어나셔서 짐승들의 먹이통에 누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몰라주어도 허다한 천군 천사들은 찬송합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 보면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8-14)고 합니다. 

그 지역의 목자들이 밖에서 양 떼를 지키는데 주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의 영광의 비취자 크게 무서워합니다. 그때 천사의 소식이 이것입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합니다. 그 기쁜 소식을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받습니다. 


그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구주가 오셨답니다. 그리스도 주가 오셨답니다. 

왜 이것이 기쁨의 소식입니까?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그늘에 갇혀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속이고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소식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비천하고 죄인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있고, 왕궁에 살고, 성전에서 높은 자리 차지한 사람들은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재앙의 소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의 마리아의 찬양을 보면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1:51-53)고 합니다. 

마리아의 찬양 속에 있는 것처럼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일을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다 복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지독하게 세상의 부를 탐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기뻐한다는 것은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2-2)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요한복음 16장 말씀에 보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서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성령이 임하여 알게 된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누구를 믿고 살았나요?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착함의 능력,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님도 나를 도와주는 알라딘의 거인 지니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구주라고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한 주님이 어디에 오셨습니까? 12절에 보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합니다. 가축의 우리에서 태어나는 아기도 없겠거니와 구유에 놓인 것이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메시아가 될 표적을 줄 게 없어서 구유에 놓은 것을 표적으로 주시는 것입니까? 주님이 오신다면 좀 더 대단한 능력으로 초인적으로 태어나셔서 자신이 구주임을 알리시면 되실 텐데 왜 이런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를 다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무엇을 기쁜 소식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다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죽어도 마땅한 비천한 벌레보다 못한 짐승임을 인정하십니까? 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게는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맞다고, 아멘이라고 고백하면서 누가 자존심 좀 상하게 하면 상대방을 칠 듯이 하는 게 우리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유에 오신 것이 표적이 되는 것은 단지 목자들이 알아보기 위한 표적만이 아니라 짐승의 먹이통에 오셔서 짐승 같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낮아지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을 빗대어 욕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인간은 짐승보다 못합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고 합니다. 또한 예레미야 8장에도 보면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8:7)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나 나귀나 학이나 비둘기 제비 두루미만도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과연 아멘이 되십니까? 그러므로 짐승보다 못한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고 자신이 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얼마나 기분 나쁜 소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의 뜻을 제대로 알고 믿는 일이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삶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따라오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들이 원하는 그런 양식을 주시고자 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 영생의 양식을 주시려 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고 심히 어렵다고 하면서 떠나가서는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을 위하여 육적인 양식과 기적을 바라고 오는 자들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영생의 양식이 된다는 말씀인 것에서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하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렇게 답변을 하였지만 그러나 정작 십자가 지는 현장에서는 다 도망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홀로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죽기까지 백 퍼센트 홀로 이루시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 광경이 인간이 볼 때에는 가장 저주받고 실패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부터 보면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3-14)고 합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그 주님의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 소식을 기쁜 소식을 받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탄절이 되면 세상의 장사꾼들이 먼저 난리입니다. 나이트클럽이나 백화점이 먼저 장식을 합니다. 교회도 뒤질세라 장식을 하지만 세상의 장식만큼 멋있거나 화려하지 못합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간에 자기들이 기뻐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만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만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심판의 소식입니다. 

 

(3-1)
천사들을 통해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복음을 들은 목자들이 베들레헴에 달려가서 구유에 놓인 아기를 만납니다. 그 모습이 목자들에게 표적이 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짐승보다도 못한 우리를 위해, 우리가 먹어야만 하는 양식으로 오셨음을 알게 하기 위해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요한복음 6장의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3-57)고 하신 말씀처럼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짐승의 집인 우리의 구유에 누이신 모습이 구주가 되심의 표적이라는 것은 성경의 말씀처럼 자신이 짐승과 같은 존재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임을 아는 자들은 먹이통인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살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죄인됨을 아는 자들은 주의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주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의 자신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따라다녔던 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하니 다 떠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자신이 짐승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먹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는 되는 것입니다.

 

천사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 모습을 보게 되고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이야기해 준 이 아기에 대한 말을 해 줍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른 바와 같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우리 위해 오신 구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시고 또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처럼 짐승과 같은 자들이라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자들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가 영생의 양식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그 살과 피를 주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항상 우리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며 기대하며 또 그 양식을 먹음으로 배부름과 만족을 누리며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하도록 하는 그 양식을 위해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을 듣고 만나 자들이라면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그 증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복음을 듣고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참된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기며 주어진 모든날들 속에서 그 은혜를 맛보아 누리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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