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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좁은 문과 넓은 문

본문 / 7:13-14

 

1. 행함

우리는 믿음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마 말씀에 대한 실천의 여부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지 살지 못하는지의 여부인데 그것을 행함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많은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을 실천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천이 있으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없으면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사고방식이고 또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믿음이 크게 잘못 이해되어 종교의 수준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종교의 길을 가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심각성입니다.

믿음을 실천으로 이해하고 실천의 여부에 초점을 두게 되면 믿음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게 됩니다. 어쩌면 믿음의 내용이나 방향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천만 있으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것으로 믿음의 문제는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믿음의 내용이나 또 믿음의 방향이나 하는 것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시간을 정하여 기도한다면 그것만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실천과 행함이 믿음의 방향성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실천과 행함만으로 그들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까지 하시면서 그들이 자부하는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비록 드러나는 행위가 신앙적인 모습이라 해도 그 내용이나 또 방향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신앙의 싸움은 내용과 방향이 되어야지 행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행함을 두고 신앙이 좋은가 나쁜가의 싸움을 한다면 행함이 있는 사람이 이기게 되고 결국 우월한 신앙의 위치를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도 방향도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이 어디인 것입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참된 방향이 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누구나 자신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지를 오늘 본문 말씀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좁은 문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같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자신이 무엇을 실천하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이 나아가는 신앙의 방향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넓은 문을 찾게 되어있음을 전제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고 또 육신에 유리한 것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그 길을 좇는 속성의 존재라면 반드시 좁은 문이 아닌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문으로 들어가서 어떤 길로 가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많이 듣긴 했어도 자신이 가는 믿음의 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나는 예수를 믿고 있기에 좁은 길로 가고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좁은 문이냐 넓은 문이냐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 주어질 때가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 십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좁은 문과 넓은 문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는 현재의 문제, 즉 현실인 것입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에 대한 말씀이 믿음의 현실에 대한 내용이라면 신자는 행함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행함이 있으면 믿음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반대로 행함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믿음에 문제 의식을 가지면서 결국 행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서 행함으로 믿음의 잘잘못을 판단하려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방향에서 크게 어긋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은 우리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한다 해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막혀있는 문이고 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리에게 생명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인데, 왜 예수를 믿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협착한 길을 가는 것으로 말씀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오늘날 신앙이 있다고 하는 우리가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실천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믿음의 어려움으로 인지하는 것입니다. 실천이 결국 육신의 수고와 노력을 요구하고 또 물질과도 연결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찾는 넓은 길은 어떤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좁은 문보다 실천을 적게 요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아예 실천의 요구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아예 실천의 요구가 없다면 믿음이 쉬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실천의 요구가 없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비록 힘들다 해도 실천이 있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해 있다면 그 믿음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자기 확인과 자기 인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의 방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해 있지 않고는 죄에 붙들려 있는 자신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다는 자기 인식으로 출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다는 것은 기독교적 실천이나 도덕적 행위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인간의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인간의 변화가 바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생명의 길을 갈 수 없고 또 믿음도 가능하지 않다는 자기 인식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수고와 노력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같은 자기 인식은 오직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을 예수께로 끌어가지 않으시면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이것이 믿음의 방향이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는 증거라는 것을 잘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게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실천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믿음이 좋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부인하게 합니다.

태복음 26장에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라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드로만의 다짐이 아닙니다. 35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26:35)고 하여 모든 제자들의 다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다짐은 거짓이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그 날 밤에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26:56)고 하여 전부 도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 살기 위하여 도망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시고 난 후에는 모두 순교자가 되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제자들이 순교하면서 그것을 자기의 실력이나 믿음이 좋아서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진심으로 다짐과 고백을 해도 자기가 이해관계에 놓이게 되면 언제나 자기가 살기 위해 주를 부인하는 것이 우리인 것입니다. 그걸 알게 하시고자 주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이런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해석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고 또 그리스도께로 향한 믿음인 것입니다.

 

3. 넓은 문

그러면 넓은 문은 무엇입니까? 넓은 문은 믿음의 방향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자부하는 제사장과 장로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로만 향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의 믿음은 자기 자랑과 우월로 나타났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자신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타인보다 더 낫다고 하는 우월과 자랑이 있었고 또 그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상을 원했을 뿐만아니라 그것을 믿음의 의미와 보람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생활이 자신의 의와 자랑으로 돌아오기에 믿음의 방향이 자기에게로 향한 사람들은 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일뿐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3-14)고 말합니다.

여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구원은 인간이 싸워서 승리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고 승리하심으로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모든 문제는 우리의 행함과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행함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믿음이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서 자연히 맺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함으로 인하여 타인에 대해 전혀 우월감을 갖지 않는 것이나 또 어떤 행함에 대해서도 자기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 믿음의 의한 행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소유를 기준으로 한 차별도 없게 되는 것이고 목사나 장로라는 권위도 내려놓게 됩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막연한 생각이나 말에 머물지 않고 그 심령이 은혜에 이끌리면서 성령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내용과 방향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믿음을 이해하고 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행함에 초점을 두게 되면 성령이 우리의 믿음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해서도 오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했다 안했다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행함을 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에게로 향해 있을 때 그 길은 멸망으로 향할 뿐인 것입니다.

말씀의 방향이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다면 말씀을 실천하는 나’, ‘말씀대로 행하는 나는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자랑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유일한 의가 되시고 생명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로 그 진리를 알게 하신 주의 손에 이끌리어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을 누리며 사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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