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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헛된 경건과 참된 경건

본문 / 1.1:26-27 


1. 잘못된 경건 행위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음으로 해서 변화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면 말씀의 능력에 이끌려 감으로써 변화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가 흔히 생각하는 외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물론 외적 모습, 즉 행동과 실천이 달라지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변화의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났던 운동 중에 경건 운동이 있습니다. 17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경건주의라고도 합니다. 경건 운동이 강조한 것은 살아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즉 실천적 신앙을 강조한 것입니다.

들이 살아 있는 신앙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은 것은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으로 간주했고 실천은 신자를 경건한 사람으로 만든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행위란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행함은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실천한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에서 소위 믿음의 행위로 말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진심으로 믿음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위가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구제라는 것이 믿음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인지,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인지, 헌금하는 것이 믿음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교회가 믿음의 행위로 여겼던 것들이 실상은 참된 믿음의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헌금을 하는데 하나님 제가 헌금을 하면서 내 것을 아끼는 욕심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헌금을 하면서 내가 믿음으로 살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하는 헌금이라면 어떻습니까?

헌금을 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보게 되고 따라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이러한 헌금을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믿음은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하는 헌금은 헌금하는 행위에서 자신의 의를 보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자신의 헌금에서 자기 죄를 보게 하고 결국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다시금 실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연보하는 행위는 같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같지 않고 또 소망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행함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다 알고 있고 또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몸 담고 있는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에 소망을 둔다면 그것은 믿음의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소망하고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은 있되 삶은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말하면서도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제아무리 기도하고 성경을 본다고 해도 그러한 것은 다 믿음과 상관없는 것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국을 말하면서 왜 교회가 커지고 성장하는 것에 목매달고 사는 것입니까?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자신의 믿음을 보고 싶을 때는 내가 한 말을 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과연 진심으로 하늘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다스림 받으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교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리고 경건 운동은 그런 종교개혁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했습니다. 중세시대에 로마 가톨릭이 부패하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강조했고 이것을 개혁신학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개혁신학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강조하다 보니 소위 뜨겁고 열정적인 실천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냉랭하다며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바로 경건 운동입니다.

경건 운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뜨거움이 없는 개혁신학의 부족함을 경건 운동으로 채우겠다는 의도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 운동에 있는 함정입니다. 소위 뜨거운 신앙으로 자기만족을 얻고자 하는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이 같은 자기만족이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세계는 그러한 종교적 만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2. 헛된 경건과 참된 경건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경건은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1:26-27)고 경건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경건의 내용을 보면 아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경건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말한 경건에는 우리가 경건으로 이해하는 외적 모습들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이해하는 경건은 신앙적 삶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스스로 매일 시간과 규칙을 정하여 기도하고 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경건의 삶으로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거나 세상 문화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 등을 경건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고보는 경건을 그러한 외적 모습과 상관없이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할 정도로 참된 경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야고보가 말하는 헛된 경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의 외적 실천을 보면서 스스로 경건하다 할지라도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인다면 그의 경건은 모두 헛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말한 헛된 경건, 즉 혀를 재갈 물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것을 말이 많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말이 많으며 사람이 가볍게 보이고 경망스럽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관적 기준에 의한 자기 판단이고 느낌일 뿐이지 성경과는 무관합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19)고 말합니다. 신자가 듣기를 속히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판단이 먼저 있게 되면 스스로를 경건하다 하며 자신의 실천을 자랑하는 말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들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게 되면 성을 낼 자격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에게는 말씀이 재갈이 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경건하다’ ‘나는 신앙이 좋다’ ‘나는 복음을 안다는 말들이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것이고, 그것을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헛된 경건으로 치부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도 세상을 추구하고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원하면서도 천국을 소망한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 혀가 재갈 물리지 않는 것이며 이것이 헛된 경건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경건은 실천적 행위와 무관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경건으로 말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을 구제로 이해한다면 구제라는 실천이 경건으로 부각되게 됩니다.

또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세상 문화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것이 또한 경건의 기준이 됩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실천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며 다른 종교의 세계에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경건은 인간의 행위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와지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이라면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은 단순한 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6장에 보면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16:11-12)고 말합니다.

칠칠절에 대한 규례인데 칠칠절을 지킬 때 노비, , 고아, 과부와 같은 약자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약자를 무시하지 말고 잔치에서 소외되지 않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중점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비, , 고아, 과부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으로 생활할 때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이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약자의 모습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에 존재하게 하셨던 노비, , 고아, 과부들을 세워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본래적 모습이 무엇인가를 잊지 말라는 것이 약자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본다면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통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본다는 것이고 그들을 돌보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불쌍한 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입니다.

 

3. 우리의 실체

자신을 불쌍한 자로 여기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세움 받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쌍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지 않으시면 소망이 없는 저주 아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참된 경건은 자신을 불쌍한 자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간의 존재가 불쌍하다는 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적인 현실입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과연 신자가 자기 존재를 파악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지의 여부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함께 언급하는 것도 야고보가 말하는 세속이 세상 문화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기준하여 자신을 보게 되면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을 기준하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천국에 마음 두지 못하며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세상에 집착하는 자신의 현실에서 불쌍함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는 증거는 자신을 불쌍한 자, 약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인정해 주는 경건의 모양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드러내고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세속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경건의 모양으로 목사 됨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고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바리새인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경건의 모양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인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돌아서라는 것은 비록 최고 수준의 경건의 모양이 있다 해도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불쌍한 자임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세계로 끌어갑니다. 그리고 긍휼과 은혜를 구하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자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나에게 진심으로 있어야 할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경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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