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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본문 / 딤전 1:18-20

 

1. 양심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입니다. 이 의미대로 이해한다면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기능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선, 해로운 것은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구축된 선악 체계이고 이러한 선악 체계에서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자기 양심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고 비록 양심껏 살았다 할지라도 양심이 의가 되어 구원받는 일은 없습니다.

 

2. 착한 양심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고 말씀합니다. 신자에게 믿음이면 될 것 같은데 착한 양심을 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착한 양심은 또 무엇일까요? 착한 양심이 있다면 악한 양심도 있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은 구원을 위해서 믿음만 있으면 안되고 착한 양심도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은 믿음에 의한 양심이란 뜻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가능한 양심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착한 양심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착한 양심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는 양심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의 양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과 연관된 양심이 있는 반면, 믿음과 관계되지 않는 양심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령 목사가 주일성수에 대해 설교할 때 주일을 잘 지킨 사람들은 당당한 반면에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에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라는 것을 합니다. 앞으로는 주일을 잘 지키겠다는 결단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닌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을 때 마음이 찔리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신자로서 당연한 마음 자세로 생각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착한 양심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의한 양심이 아니라 종교심과 윤리에 의한 양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음은 자신의 행함을 보지 않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에 의한 신자의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주일에 교회 가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마음에 가책을 받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자기 행위를 바라보며 자신이 생각하는 신앙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지 믿음이 있는 신자의 마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며 자신이 생각하는 신앙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찔리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십자가 은혜를 외면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착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 착한 양심은 당연한 것이기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이러한 착한 양심을 버렸다는 것은 그것은 도덕과 윤리의 의미에서 나쁜 행동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공로와 행함을 높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높이고 자랑하게 되는데 자기 행함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믿음으로 인한 착한 양심을 버린 것이고 그것이 곧 믿음이 파선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인한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된 상태에서 예수를 찾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게 하시는 주의 은혜로 그 마음이 향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를 찾고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착한 양심을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신자가 믿음이 있다면 도덕과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양심은 믿음과 관계없이 누구나 말하는 것이고 또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신자가 윤리와 도덕을 벗어나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윤리와 도덕을 초월해 있는 것이 신자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윤리를 초월한 삶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은혜만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만을 높인다는 것은 죄인 된 우리 자신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을 알고 예수님의 피의 용서만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윤리와 도덕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도 도덕도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고 말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켰고 그들의 삶의 모습은 유대 사회에서는 의롭게 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율법을 실천하는 자기 의나 행함으로는 천국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수준 높은 율법 실천과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의와는 차별적인 다른 의를 요구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알아들었다면 율법을 실천하는 자기의 의로는 천국 갈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율법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율법의 실천과 행함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는 것은 좀 더 수준 있는 윤리와 도덕적 실천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과는 다른 의를 증거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른 의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1-22)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의를 믿는 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에 의해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착한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착한 양심으로 인해 예수님의 의를 높이지 못하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며 또 자기 이름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신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고, 더 간절히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서 맺어지는 결론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3. 신자의 양심

로마서 2장에 보면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2:12)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율법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은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율법이 없어도 범죄하고, 율법이 있어도 범죄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망해야 할 존재임을 거부합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은 율법을 실천하는 자신을 내세우고, 율법 없는 이방인은 양심에 따라 바르게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죄고 저주받을 인간으로 말합니다. 결국 인간은 율법으로든 양심으로든 죄를 범하는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계속 로마서 213절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2:13)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는 율법을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함으로까지 이어져야 의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참된 행함이 우리를 의의 자리로 끌어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참된 행함은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자리까지 내려가게 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율법의 행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착한 양심이 있는 신자는 자신의 전적 무능력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의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양심은 길에서 돈을 주웠을 때 주인에게 돌려주고, 장사하는 사람은 물건과 저울을 속이지 않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수준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도 가능한 양심을 사도 바울이 믿음과 함께 언급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착한 양심에 초점을 두어야 하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 없는 이방인들은 자기 양심을 근거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4-15)고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도 본성이 있는데, 그 본성이 하는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 있는 유대인이 율법으로 자신의 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양심대로 살았다 해도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착한 양심은 항상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매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착한 양심으로는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자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양심에 따라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고 나 같은 자를 살리기 위해 찾아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존귀하게 여기고 높이고 자랑하는 길로만 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의한 신자의 착한 양심은 절대로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신자의 마음에 찔림이 되어 애통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오늘도 주의 음성 앞에 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양심이 있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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