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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문 / 고전13: 1- 3

 

1. 경험

사람은 자신이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느끼고 보고 경험해야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느끼고 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분명 느끼고 보고 경험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보고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면 마치 신비주의자들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하나님 경험은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경험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루12:1-5)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하면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일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셋째 하늘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신비주의자입니까? 바울을 신비주의자라고 하려면 내가 가 본 셋째 하늘, 즉 낙원을 여러분도 가 봐야 하고 경험해야 합니다라고 주장을 했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자랑하며 그러한 경험이 있어야 신자인 것으로 주장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셋째 하늘의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한 것이 자신의 자랑임을 말함으로써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 같으면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체험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이 하나님을 경험한 것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체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자신의 약함에서 하나님을 경험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추상적으로 머물지 아니할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보고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나님을 말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견해)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관념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을 말한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없게 됩니다. 스스로는 믿음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 또한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종교인으로 종교 생활에 충실했을 뿐, 복음과는 멀어진 길을 갔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음의 방향을 바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에게는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은사

오늘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에서 사랑이 없으면라는 문구를 빼고 보면 모든 기독교인이 꿈꾸고 열망하는 아주 이상적인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신의 몸까지 불사르게 내어주는 순교까지 당하는 것이야말로 인격과 삶과 능력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신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인이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존경받고 대접받는 인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엄청난 신앙인의 덕목을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 한마디로 완전히 무너져 버리게 합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하늘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의 비밀, 즉 복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은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은사를 사랑과 연결하여 사랑 없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제아무리 고도의 신앙인다운 덕목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고 또 가치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 어떤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은 사랑이 없어도 은사적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최고 능력으로 인정될 수 있는 산을 옮기는 믿음도 사랑 없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적용해서 달리 말하자면 사랑 없이 기도하고 성경보고 봉사와 헌신도 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했다면 누구라 해도 그것을 사랑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신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구제 자체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말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세상이 추구하는 도덕과 윤리의 세계를 벗어나 복음의 세계를 만나기 위해 이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이 이해하는 사랑과 성경이 증거 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나 성경이 증거 하는 사랑의 본질이 같다면 바울은 본문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이 없다면이라는 바울의 말은 복음이 증거 하는 사랑의 세계와 세상의 사랑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러면 사랑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사랑이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이 질문에서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가 어려운 이웃을 얼마나 도왔는가?’일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고 상식입니다. 이러한 기준과 상식으로 하나님께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믿음이 관념적으로만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은사입니다. 오늘 본문 앞의 마지막 절인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더욱 큰 은사도 사랑을 지칭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은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증상 중의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성령으로만 알게 됩니다. 결국 바울은 사랑을 은사로 말하는 것은 그 사랑 또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사랑을 더욱 큰 은사로 말함으로서 은사는 우리 스스로 계발하고 훈련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임을 주지시키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면 은사는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은사도 자기 자랑을 위한 도구로 세워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은사를 주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약 각자의 은사를 두고 비교하고 가치를 따진다면 그것은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잊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이 되고, 이러한 사람이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구제를 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자기 자랑과 자기 의가 될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자신이 어떤 은사를 받았다 해도 은사를 받은 자신이 아니라 은사를 주신 분을 지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사는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더욱 큰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을 받은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3. 참 사랑

린도전서 12장에 보면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라고 합니다.

개의 기독교인들은 이 은사에 관심을 둡니다. 그 이유는 은사를 받으면 자신의 믿음이 특별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자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만 있어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그 은사 하나만으로도 교회를 부흥하게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여건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과시와 자기 자랑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사랑이 없는 것이고, 관념적인 믿음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결코 자신을 지향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관념적이 아니라 실제가 되고 믿음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된다면 그 믿음은 우리를 자기 부정이라는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 아래 있는 모든 신자가 각기 다른 은사와 삶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동일한 마음과 뜻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며 사는 같은 길을 가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삶이 되는 실제의 신앙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러면 사랑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이 있다면 무엇보다 자신이 부정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같은 교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조금 도와주는 것으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하며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서로에게 나타내고 전달하고 그 은혜로만 교제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이웃 관계에서 만납니다. 이 관계에서 우리가 중요시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긍휼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은 나는 불쌍히 여김받아야 할 자라는 자기 인식입니다. 모두가 이런 처지에 있는 존재로 함께 할 때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믿음에서는 그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생각은 있을지언정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 이웃을 만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죄인의 자리에 있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두기에 사랑이 없는 관념적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저주받아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으신 것이 관념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지식이 아니라면 믿음은 우리를 낮은 자리로 이끌어 가서 예수님만 바라보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고 실제가 되어 증거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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