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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과 진리의 예배

본문 / 4:19-24

 

1. 예배

신자는 매 주일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대예배로 불리는 주일 오전 예배를 포함해서 오후 예배 또는 수요일 예배와 거기에 새벽예배와 여러 행사로 인한 예배를 포함하면 소위 신앙에 열심이 있다는 분들은 일주일에도 몇 번의 예배를 매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24절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 말씀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분명하게 다가오기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예배에 대한 기존의 우리 생각에 막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믿음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목사의 인도를 따라 주보에 정해진 순서대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은혜는 전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판단합니다. 예배로 인한 자기감정과 기분으로 은혜의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과 진리의 예배는 이 모든 것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우물에서 한 여인을 만나 대화한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대화 중에서 23절부터 보면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3-24)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는데, 이렇게가 의미하는 것은 24절에서 영과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영광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만이 참된 예배인 것이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은 과연 존재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으니 그것은 곧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과연 인간이 영광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워진 것이 인간인데 그러한 인간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아는 답처럼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영과 진리는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인간이 모든 정성과 노력을 동원한다 해도 영과 진리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게 되고 또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을 예수님이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 의해서 영광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 있게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예배하는 그들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기에 그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과 여인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 앞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4:16)고 하시고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4:17)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4:18)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은 한 남자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 남자, 저 남자 갈아치우는 창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그 여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여인으로서는 수치스러움에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선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여인은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드러내는 예수님에게서 선지자적인 모습을 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의 시작은 물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14절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4:15)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한 물을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신비한 효능이 있는 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한 물이 있으면 매일 같이 번거롭게 물을 길으러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생활의 편리를 중점에 둔 것이고, 그것이 말씀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을 참된 말씀의 세계로 이끄시기 위해 남편 이야기를 언급하셔서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곧 예수님과 우리의 대화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에 오늘날 에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서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 앞에 계시고 대화를 한다면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 앞에 선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 주실 것 같냐는 것입니다. 남북문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슨 정치와 경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러한 것들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대화한다면 대화의 주제는 바로 죄 문제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고 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숨겨질 수 없이 다 드러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빛 되신 말씀 앞에 우리의 모든 죄악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시는 역할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알게 하사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는 말씀처럼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에 세워 주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구하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모든 죄악을 들추어내는 것처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대화의 주제는 결국 인간의 죄의 문제를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와 소통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죄 문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님을 말할 때는 죄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고 하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죄로 인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거북스러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죄를 가린 상태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의 위선이고 거짓일 뿐인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아보면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4:20)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갑자기 예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배를 죄를 씻기 위한 통로로 보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드러내셨기에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통로로 예배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 장소입니다. 이 여인이 거하는 사마리아에는 그리심 산이라는 예배 장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되어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21)고 말씀하심으로 예배는 고정된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어떤 장소로 가야 한다는 고정된 생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3. 영과 진리의 예배

그러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3절에서 말씀한 이때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의 비밀을 전파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모든 것을 포함한 의미의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는 없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의 예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스라엘 가운데 성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제물의 피로써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는 제사에만 충실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백성이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뜻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제사라는 형식에만 열심이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에 장사꾼들이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면서도 그 제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드리는 제사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전혀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들은 다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만 중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문제가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제사와 제물에 대하여 그들이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친히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또 친히 제물이 되게 하셔서 구약의 모든 제사를 그치게 하는 온전한 제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제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가운데 반복되어 드려지던 제사가 그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이 말씀을 잊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드리는 반복되는 제사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가 친히 드릴 제사에 모든 희망을 두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온전한 제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제사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으로 드렸던 이스라엘의 제사가 이스라엘을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예배를 빠지지 않고, 헌금하고, 기도하며, 봉사하면 그런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신앙인인 것처럼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의 현실이며 또 오늘날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과연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가능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자기 몸을 제물 삼아 피 흘려 하나님께 드린 것만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예배는 우리의 어떤 의식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담당해야 할 저주와 죽음을 예수님에게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신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저주와 죽음 아래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는 복 받을 자가 아니라 영원한 저주와 죽음에 붙들리는 것이 당연한 자로 나와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저주와 죽음에서 해방시켰다는 사실이 복과 진리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선포입니다. 진리 또한 우리가 죽은 자임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영과 진리 아래 있다면 그 증거는 나는 죄로 인해 죽은 자이며 죄인의 괴수일 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셔서 이러한 참된 예배가 가능하게 하시고 그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고 합니다.

여기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기름이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벨의 제사에는 장차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드린 제사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과 진리는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합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보게 하시고, 죽음이 마땅한 내가 무엇으로 인해 살았고 존재하는가를 보게 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의 은혜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의 예배입니다.

이러한 영과 진리의 예배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실체를 놓치지 마시고 이미도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과 은혜를 온전히 누림으로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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