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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본문 / 1:17

 

1. 하나님의 의

오늘 본문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란 과연 무엇일까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의는 세상이 생각하는 의, 정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로 인해서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회복하신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하나님의 의로 세상에 보내셨고, 복음은 이 아들에 대해 선포합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생각하는 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하기 때문에 믿음과 상관이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와도 상관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서 인간의 의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기 때문에 이 능력에 의해서 신자는 자신에게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는 나올 수가 없으며 다만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자신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행한 행함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것으로 평가된 적은 없습니다.

물론 창세기 6장에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라는 말씀처럼 의인이며 완전한 자라는 평가를 받은 노아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 있는 8절에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는 말씀이 있음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즉 노아의 의와 완전함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 인한 결과이고 열매인 것이지 노아의 독자적인 의지의 행함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 개과천선해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개입하지 않으셨으면 계속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지옥에 들어갈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택하셨고 부르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울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인간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어떤 일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이런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결국 인간의 의로 굳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를 근거로 해서 자신을 복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고, 타인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갖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면 욥과 같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혼란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두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도 달라집니다.

 

2. 믿음으로 사는 것

리는 대개 보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인다운 행동을 하며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남을 돕고 봉사하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말씀대로 행하는 자들이며, 믿음의 실천을 하면서 신자답게 살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 다니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실천이 있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과연 그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은 하박국 선지자가 한 말인데, 사도 바울이 그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박국 선지자가 어떤 의미로 이 말을 하였는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을 한 선지자입니다. 그 불평은 하박국서 1장에 보면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1:2-4)고 합니다. 또한 13절부터 봐도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13)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면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핍박을 받는데도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평 어린 하박국 선지자에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과 말씀이 하박국서 2장에 보면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3-4)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도 신자가 할 것은 하나님이 정한 때가 이루어질 것을 믿고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세상에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하실 그 일을 믿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됨이 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산다는 것은 말씀을 인간인 우리가 실천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허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곧 믿음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눈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새롭게 열린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의 악인의 형통이 복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의인의 핍박이 저주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곧 믿음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세계에서 인간의 실천과 행위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면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은 악인은 벌을 받아 고통을 받으며 사는 것이고, 의인은 복을 받아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분명 그런 공평을 따라 흘러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저주의 경계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인 것입니다.

악인이 잘살고 착한 사람이 오히려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의 불평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눈에 비치는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3. 믿음의 시각

로마서 1장에 보면 그런 세상의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부터 보면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 상태인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 온갖 악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 바울이 바라보는 세상은 달랐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바울의 눈에는 사람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멸망에 해당된 자들로 보였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바울에게는 세상에서 잘 되어 보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과 함께 멸망에 이르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바울은 세상에서 자신을 건지는 의가 되는 예수님만을 생명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흔히들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이 이르렀을 때 우리를 살리는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가 외칠 수 있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업신여기지만 종말의 때가 되면 예수님은 가장 존귀하시고 가장 크신 복으로 세상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하실 그 일을 믿음으로 내다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신자가 자신의 실천적 행위에 안주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릅니다.

믿음은 사람이 전혀 관심 두지 않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모든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목이 열리는 것이고 따라서 바울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참된 복과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전부로 여기며 그 기쁨을 누리는 복된 자로 머무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만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는 바울의 고백을 이해하며 그 고백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에게는 믿음이 곧 복입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복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믿지 않는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믿지 않는 상태의 절망과 비참함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예수를 믿게 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와 기쁨이 있는 생활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만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의가 생명이며 우리의 의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믿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모든 소망과 위로와 힘은 예수님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믿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산다면 그것이 기적의 삶입니다.

교회에 이런 믿음의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허락 되어진 날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 이러한 주의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확인해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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