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7,745
오늘 : 210
어제 : 274

페이지뷰

전체 : 78,685,458
오늘 : 4,160
어제 : 1,300
조회 수 29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본문 / 2:20

 

1. 옛 사람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됨을 뜻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죽음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죽음 없는 부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면 대개는 육신의 죽음을 생각하겠지만,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 즉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오직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힘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 죽음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을 실감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체험할 수 없기에 우리는 주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는 하면서도 그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러면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주와 함께 죽는다고 말하는 것은 곧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옛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대부분 예전의 성품과 행실과 같은 이러한 것들이 죽고 새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울도 우리와 동일하게 욕심이 있고, 자존심이 있고, 정욕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을 죽이고 십자가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만약 옛사람이라는 것이 욕심이나 정욕, 시기, 미움 이런 것이라면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은 신자에게서는 그런 것이 사라지고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은 신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미움 시기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진심으로 옛사람이 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 안에 여전히 그것이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옛사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신이 쌓은 의로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입니다. 즉 옛사람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행실이나 도덕의 기준에 악으로 규정되는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선행으로 그리고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의로운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대인의 구원의 방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신들의 선행과 의를 보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원에 있어서는 항상 자신만만했습니다.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그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옛사람인 것입니다.

라서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옛사람의 죽음의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 그 어떤 인간도 어떤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또 어떤 열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의 행위와 노력과 열심으로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를 생산할 수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의 의가 아닌 다른 의가 아니면 구원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 바로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믿고 의지하며 예수님만 자랑하는 자로 살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십자가에 주와 함께 죽고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행하는 어떤 선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선언하는 증거물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위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비록 평생 교회를 다니고 또한 목사와 장로라고 해도 인간이 행하는 선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또한 신자라는 증거물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 안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복음을 증거 하면서 많이 하는 말이 예수 안에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믿음 안에서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 안에서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서나 또 믿음 안에서라는 말을 선행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신자가 예수 안에서 살고,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선행을 하고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선행을 실천함으로 믿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결국 다시 옛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라는 것은 인간의 의를 근거로 하는 삶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근거로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안은 곧 예수님의 의가 우리의 모든 악을 용서하는 은혜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의의 은혜가 근거가 되는 삶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의 은혜가 아니면 사망에서 건짐받을 수 없는 자기 실상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이웃을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서는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가 또 구제받은 자로서 참된 구제가 나오는 증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항상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 가운데 거하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선행을 힘쓰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래 가지고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그 합격점에 들기 위해 여러 형태의 열심을 동원하여 자기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종교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안에서 용서의 은총을 누리는 신자에게 있어 또 다시 하나님의 합격점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실력으로는 하나님의 합격점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합격점에 도달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완벽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다 이루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한 합격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것에 대한 결과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의 신자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의 이루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악한 자일뿐이지만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속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예수 안의 신자인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는 우리에게 이 같은 소식은 진심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칭송받는 재미로 살려고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의는 세상에서 내가 칭송받고 높임 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만 높이는 복음을 자신이 높아지기 원하는 사람의 본능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핍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높임 받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의 의보다, 자신의 의를 앞세우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신앙을 빙자해서 자신의 선행을 돋보이게 하고 싶고,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고 싶어 하는 것이야말로 옛사람이 살아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이 아니라 예수 밖에서 사는 것이고, 자연히 예수님의 의와도 상관이 없는 세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내가 아닌 주가 사심

교회를 다니고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거의 동일한데 문제는 구원받은 후를 말하면서 옛사람의 방식으로 되돌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고,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산 자가 되었으니까 마땅히 선행으로 믿음을 보여야 하고 예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부터 계속해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의를 믿는 옛사람의 방식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며 또 모르면서도 그냥 맹목적으로 예수님의 의와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안이라고 해서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믿으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사는 것을 믿음이 있는 증거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그 믿음의 증거라고 여기는 선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그 행함으로 믿음의 증거를 심어 놓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행함을 구원의 확신의 도구로 삼아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로 바뀐 것이라면 분명한 것은 탐욕도, 정욕도, 시기나 경쟁심도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악함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바뀌었다고 말을 할 수는 없고 또한 그 안에 탐욕과 정욕과 미움과 시기로 가득한 인간에게서 선이 나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래서 믿음 안에 있는 신자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의 의로우심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내 안에 주가 살아계신 증거인 것입니다. 즉 내 안에 주가 살아계신 증거는 인간의 선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 의는 결코 의로 여기지도 아니하고 다만 주의 의만을 나의 의로 여기며 그리고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자랑하며 감사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리는 신앙을 가지며 살면서 옛사람을 죽이라는 말도 수없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옛사람을 죽이라고 말하는 것은 옛사람을 단지 교회가 생각하는 믿음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옛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되어집니다.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함으로써 그 십자가 아래서 자신의 악함을 발견하게 하고 또 예수님의 죽음에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되면서 그동안 구축되어 있던 자기 의가 모두 무너짐을 경험하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에게 오직 주님의 의의 그 은혜만 남게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그동안 자랑거리로 여겼던 자기 의와 선행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신자가 다시금 자기 선행과 종교적 활동을 동원하여 믿음을 증거하고 또 그 일들로 예수님께 복을 추구하고 영광 돌리겠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옛사람이 죽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된 사람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창조된 신자는 더 이상 자신을 증거 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 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오늘 본문처럼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과연 우리는 이러한 믿음 안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점검하고 살피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도 우리가 행한 것에 만족해하며 사는 자들이 아닌 오직 주의 십자가만을 우리의 의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며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행함을 보고 만족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으로 살아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주의 은혜가 나의 의로써 나를 존재케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사는 예원 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10 2022 8월 14일 / (벧전 1:8-12)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 관리자 2022.08.14 339
609 2022 8월 7일 / (약 1:26-27) 헛된 경건과 참된 경건 관리자 2022.08.07 304
608 2022 7월 31일 / (마 14:28-33) 믿음이 작은 자의 의심 관리자 2022.07.31 275
» 2022 7월 24일 / (갈2:20)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관리자 2022.07.24 299
606 2022 7월 17일 / (롬1: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관리자 2022.07.17 284
605 2022 7월 10일 / (고전 13:1-3)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관리자 2022.07.10 297
604 2022 7월 3일 / 히브리서 81. (히13:20-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관리자 2022.07.03 241
603 2022 6월 26일 / 히브리서 80. (히 13: 18-19)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관리자 2022.06.26 176
602 2022 6월 19일 / 히브리서 79. (히 13:16-17) 우리를 인도하는 자 관리자 2022.06.19 189
601 2022 6월 12일 / 히브리서 78. (히 13:9-15) 신자의 입술의 열매 관리자 2022.06.12 202
600 2022 6월 5일 / 성령강림주일 / (행 2:1-4)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관리자 2022.06.05 188
599 2022 5월 29일 / 히브리서 77. (히 13:7-8) 동일하신 그리스도 관리자 2022.05.29 216
598 2022 5월 22일 / 히브리서 76. (히 13:4-6)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관리자 2022.05.22 256
597 2022 5월 15일 / 히브리서 75. (히 13:1-3) 형제 사랑 관리자 2022.05.15 208
596 2022 5월 8일 / 히브리서 74. (히12:25-29)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관리자 2022.05.08 298
595 2022 5월 1일 / 히브리서 73. (히 12:18-24) 우리가 이른 곳 관리자 2022.05.01 174
594 2022 4월 24일 / 히브리서 72. (히12:16-17)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관리자 2022.04.24 255
593 2022 4월 17일 부활주일 / (고전 12:12-19) 부활을 누리는 삶 관리자 2022.04.17 176
592 2022 4월 3일 / 히브리서 70. (히 12:14)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관리자 2022.04.03 211
591 2022 3월 27일 / 히브리서 69. (히 12:9-13) 하나님의 징계의 유익 관리자 2022.03.27 23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