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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동일하신 그리스도

본문 / 13: 7- 8

 

1. 동일하심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도 그만큼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세상이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져 가기에 세상이 변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 뿐이지 세상의 속성은 사실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변한다고 생각합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변한다고 여겨지는 것 역시 겉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세상의 속성이나 사람의 본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말씀의 효력과 위력이 그대로 담긴 채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두고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악함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서 벌어졌던 범죄의 모습들이 그대로 지금의 시대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껏 중지됨이 없이 에덴동산의 죄 아래서 세상은 흘러왔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유혹한 말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3:5-6)라고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니 먹음직도 보암직도 그리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겨진 것입니다. 누구 보기에 그런 것이며 또 누가 지혜롭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까? 인간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며 또 먹으면 자신을 지혜롭게 해 줄 것 같아 따 먹은 것입니다.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무시하고 따 먹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창세기 6장에 보면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라고 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위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삶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지음받았음에도 오직 자신의 이름과 성공만을 위한 마음으로 계획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며 노아 때에 물로써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의 홍수 이후의 인간은 달라졌습니까? 창세기 8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8:21)라고 합니다.

인간은 노후 홍수 심판 이후에도 결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니다. 다시 말해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다시는 그런 인간으로 인해 심판하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 인간의 삶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만 보더라도 아모스서 4장에 보면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4-5)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십일조나 제사 등이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 아닌 자신들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이 얼마나 싫으셨는지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제물을 드리며 행하는 모든 성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위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인간이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실체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변하지 않고 세상이 변하지 않으며 죄가 변하지 않는다면 또 하나 변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고 말씀을 합니다.

한마디로 어제의 예수님이나 오늘의 예수님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그리스도나 지금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나 동일하신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베들레헴의 짐승 우리의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세상의 죄로 인해 오신 분이라면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예수님도 우리의 죄로 인해 오신 바로 그분이어야만 합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안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나 오늘날의 우리들이나 동일선상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내용 하나하나가 어떤 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내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2. 그들의 믿음, 우리의 믿음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13:7)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게끔 복음을 전하여 준 믿음의 조상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위협과 핍박 중에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순교까지 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실은 죽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이 세상에서 고요하고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의 모든 내용들은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증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죄 아래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동일하신 것이고, 말씀도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세상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계시 된 그분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모습이 초대교회 때 사도들의 믿음과 동일한 것입니까?

7절에서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서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보였던 믿음만이 참되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아무거나 믿음으로 갖다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세계를 살아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는 그리스도가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충만된 세계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인데 과연 그리스도를 부르는 우리가 그러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하늘로 가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지금은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분과 동일하다면 예수님을 부르면서 나의 복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이것이 사도들의 믿음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아실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세상의 복을 구했고 그것으로 자랑하였다면 우리에게도 당연히 그 믿음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도들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나의 복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 아닌 믿음, 즉 가짜 믿음이며, 가짜 복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일하신 분이라면 어제의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 것처럼 지금의 예수님도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성령을 보내시고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놓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책임지시는 것이기 때문에 어제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구원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는 예수님이 일하셨지만 하늘로 가신 지금은 자기 백성에게 믿음과 힘을 주시면서 일하도록 도우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말씀하는 동일하신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하시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코 믿을 존재가 못되고, 하나님의 일을 맡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그런 인간에게 일을 맡겼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변화를 말하지 않고 있으니 결국 다른 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힘들고 고달픈 삶의 현실도 동일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편히 살게하기 위해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의와 거룩과 진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지금도 동일한 뜻을 가지시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고달픈 삶도 신자에게는 불평할 조건이 못 되는 것이고, 오히려 고달픈 것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것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으로 사셨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예수님이 바로 그분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예수님이 동일하신 그리스도라면 예수님이 당하신 그 모든 일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들인데 그런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들 하는 대로 흉내 낸다고 해서 신앙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님을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참된 믿음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고침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똑같은 문둥병을 고침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돌아와 감사하는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을 하십니다.

그러면 문둥병자에게서 믿음은 무엇입니까? 병이 고침받은 것입니까? 하지만 병은 나머지 아홉도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음이 없는 자로 규정됩니다. 세상은 병 고침 받는 것을 대단한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문둥병은 당시에는 불치병입니다. 살았으나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처지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병이 나았다면 아마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이 대단해서 하나님이 고쳐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병 나은 것과 믿음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아홉 명의 문둥병자도 고쳐주심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믿음은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감사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병이 고침 받았다고 해도 결국은 죽습니다. 병 고침 받은 것이 영원한 사망에서 구출된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병 고침으로 인해서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 없음이 증거될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합니다. 나를 고쳐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합니다. 육신의 병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을 고치심으로써 멸망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신 은혜를 생각한다면 예수님께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배척을 받고 죽었습니다. 사도들도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오늘의 세상 역시 믿는 자를 환영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미움받는 길을 피하려고 한다면 결국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참된 그리스도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말씀을 보면서 동일하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묵상하시고 바로 그분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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