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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믿음

본문 / 7:21-23

 

1. 내가 만든 믿음

우리는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우리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아마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우리에게 위험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사고,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즉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인간의 종교성에 의해 왜곡된 믿음 아닌 믿음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왜곡된 믿음은 구원의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과 무관한 믿음을 옳은 믿음으로 착각하고 그 믿음을 좇음으로 구원과 상관없는 결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믿음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믿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열심이 부족하고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 문제일 뿐이지 자신의 믿음이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자신감은 무모한 자신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종교심에 도취된 자기 착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받은 신자라면 인간에게는 믿음의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다만 하나님 앞에 실패자일 뿐임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우리를 자기 부인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믿음과 성령 받음에 대한 생각부터 어긋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 받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령에 대한 생각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는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믿음은 신자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할 수 있다 또는 하면 된다라는 사고를 갖게 하는 것이 믿음이지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사고는 사단의 사고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것입니다. 믿음을 모든 것을 하게 하는 능력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처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우리를 위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쨌든 예수를 믿으면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버리셔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해도 예수님에 의해 그 믿음이 믿음 아닌 것으로 부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3)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중대하고도 심각한 말을 들은 사람들은 행실이 악하거나 예수를 욕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이러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모든 사람들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받은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참된 믿음으로 보이는 것이 정작 예수님에게는 믿음이 아니었으며 도리어 불법을 행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우리 생각대로 믿음을 이해한다면 결국 우리 또한 오늘 본문의 사람들처럼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간주 되어 예수님에게서 쫓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이것보다 더 심각한 사태가 없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참 믿음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엄청난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생각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보여주고 행하는 것을 믿음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행한 일을 예수께 말함으로써 믿음을 인정받고 싶어 한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으니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행위를 드러내었겠지만 결과는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분명 행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행함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습성은 또다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으로 먼저 향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그 뜻대로 행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알았다면 과연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 뜻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부르며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인간은 아버지의 뜻을 알았다 해도 자기의 뜻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는 길로 가면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감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겠다고 말할 수 없을뿐더러 또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무엇인 것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불의함을 그대로 가지고 아버지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주를 부른다면 그것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옥에 떨어짐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보내심으로 죄에서 건지신 그 사랑과 은혜로 인한 감격과 감사의 부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의 이름으로 자신이 행한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자신의 가치 향상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인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믿음으로 오해하고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구원받고 또 상을 받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위험한 믿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인한 증상

앞에서 읽은 야고보서 2장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을 자기 부인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의미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부인이 믿음에 의한 행함입니다. 그리고 자기 부인이 있다면 사람을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세상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행함은 구제, 봉사, 헌신, 전도 등과 무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함이 성경이 말하는 행함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않음으로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자부하는 자기 행함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 큰아들은 처음에는 가겠다고 하더니 가지 않고,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더니 후에는 뉘우치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둘째 아들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21:31)고 말씀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을 둘째 아들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고 자부하던 제사장과 장로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부류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 악한 자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기준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까? 원인은 자신의 삶의 실천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는 착각에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했습니다. 말씀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으로부터 그 모든 실천과 믿음이 부인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라는 존재가 내어놓을 것이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들이 힘써 행한 보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상급의 차등을 말하고 또 믿음의 실천에 따라 주어지는 복이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행함과 실천을 보면서 자기 믿음을 저울질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와 비교하는 사태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본질을 행함에 두고 주의 이름으로 행한 자기 행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것을 믿음의 증거물로 삼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불법을 행하는 자로 규정된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일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합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자신을 바라본다면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행함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행함만이 우리 자신의 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그들처럼 자기의 행함과 실천을 보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 소경이 되게 할 뿐임을 알아 우리의 진정한 자랑은 오직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뿐임을 알고 그것만 자랑삼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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