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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 (마 6:14-15)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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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용서

본문 / 6:14-15

 

1. 상식적인 용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용서하라라든지 원수를 사랑하라와 같은 말씀에 대해 대개는 부담을 가질 것입니다. 실천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용서나 사랑을 우리의 상식 수준에서 이해한다면 부담이 가벼워질 수도 있습니다. 용서할 만한 일을 용서하고 적당히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구제하는 것으로 스스로 사랑을 실천한다고 자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준의 실천은 믿는 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가능합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하라라는 말씀으로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염두에 둔다면 성경은 신자에게만 가능한 일에 대해 말씀한다는 기준부터 확고히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용서는 세상의 상식적 기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후에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15)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를 의아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로 들리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그러한 의미의 문구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잘못을 용서하셨으니 너희도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가 아니라 너희가 용서하면 나(하나님)도 용서한다는 의미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 너희도 용서해야 한다는 순서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자연스럽다 할 수 있는데 용서라는 우리의 행위가 먼저 등장하면서 우리가 용서하면 하나님도 용서하시고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에 의아함과 당혹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윤리적 기준은 물론이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자기의 인격과 신앙의 정도를 보여줄 수 있는 수준 높은 행함으로 인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용서라는 행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인격과 신앙 됨을 보여주고자 하는 유혹의 가능성도 농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보시기에 용서의 행위가 가능한지가 의문인 것입니다.

 

2. 인간의 한계

먼저 생각할 것은 용서하라는 말은 용서하는 자의 위치에서 용서하는 자로서의 할 일을 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구도 용서하는 자의 위치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용서자의 위치가 아니라 도리어 용서를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죄인인 자들입니다. 용서자의 위치에 있을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도 용서하면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조건부 식으로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를 실천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용서는 예수님의 용서를 흉내 내지도 못하는 수준에 머물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용서의 의미를 훼방하는 죄가 될 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이며 또 영원하고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 반면에 우리의 용서는 조건적이고 보상이나 대가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용서할 자격이 없을뿐더러 용서할 입장에 서 있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왜 용서하면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용서하면 용서하겠다는 말씀에는 율법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지켜 행하면 복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가령 신명기 7장에 보면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7:11-12)고 합니다. 여기 말씀하신 것을 보면 먼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실천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를 이스라엘이 만족시켰을 때 하나님도 언약을 지켜 인애를 베푸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요구에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부각 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과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인애를 받을만한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셨고 이스라엘에게 인애를 베푸셨다면,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실천과 행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공로를 높이거나 자기 자랑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높이고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 즉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에 실패 했음에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에게 언약대로 인애를 베풀어 주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행하심만이 자랑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가 용서를 실천했을 때 그것이 조건이 되어 용서하신다는 의미의 말씀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로 이해할 분도 없겠지만 오늘 본문의 문장 자체를 무시하고 무조건 자기 이해만을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바른 이해의 방향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의미에서 율법적 시각에서 먼저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지기에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3.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오늘 본문 앞에는 우리가 흔히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6:12)라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용서에 대한 기도를 말씀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또 다시 오늘 본문에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용서에 대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앞에 있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담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즉 주기도문의 내용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기도문의 내용대로 살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도조차 없다고 할 수 있는 게 우리의 실체인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기도를 단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인정해 주는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 것이고, 아버지라는 것은 자신을 아버지의 자식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식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짧은 기도에는 우리의 아버지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나의 뜻은 존재할 수 없음을 믿고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만 이끌려 순종하게 해달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나의 뜻을 내려놓는 길로 가고자 할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내 이름은 높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주기도문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기도문을 하면서 무엇을 알아야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의도조차 없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결국 주기도문은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로 끝날 비참한 운명임을 알게하고 보게 함으로써 그 같은 우리를 용서로 대접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감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높임 받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밖에 있는 자의 처지가 어떠함을 알기 때문에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에 간절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죄를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에 용서받기 위해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세계가 얼마나 크고 깊은 은혜와 사랑의 세계인가를 깨닫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쁨과 감사가 되고 그로 인해 사람의 잘못도 용서하게 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4. 용서하라의 의미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21-35)고 합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용서에 대하여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답하여 주신 비유입니다.

여기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탕감받았다는 것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는 자의 빚인 백 데나리온은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의 탕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것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백 데나리온은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잘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탕감해 준 임금은 33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18:33)라고 하여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고 합니다. 이 말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취소된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에게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증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았다고는 하면서도 그에게서 그 형제를 용서해 주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자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진심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나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존귀한 은총으로 자리하고 있는가?’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존귀한 은총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에 의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게 되는 은총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라는 말씀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은총을 아는가?’라는 깊은 물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용서받을 이유도 가치도 없는 것이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체와 존재성을 알게 된 사람은 용서자의 위치에 서 있지 않습니다. 항상 용서받을 자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잘못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용서자의 위치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일하게 용서받아야 할 위치에서 바라보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용서가 아닌 판단과 비판으로 흘러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습성입니다.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고, 정죄 받지 않으려면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고, 용서받으려면 용서하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쉽게 비판하고 정죄하고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비판을 받을지언정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겠다는 완악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우리의 인간성을 놓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판이 없고 정죄가 없고 용서만 있는 나라인데 그 같은 나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 아래 있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붙들어 놓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이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에 열광하며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으로 채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기적으로 증거되기를 열망하시고 소원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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