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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믿음과 인간의 신념

본문 / 26:33-35

 

1. 완악한 인간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고 합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믿게 하심으로 믿음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결심이나 의지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을 사는 이 세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이후의 인간의 역사가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가령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발단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에 있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의 제사를 받으실 것이라는 가인의 착각이 자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거나 또는 제사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해 가인이 분노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나 또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누구든 간에 자신과 자신의 손으로 한 것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착각임과 동시에 버리지 못하는 고집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고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기 확신과 의지 그리고 자기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향해 완악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인간의 실체인 것입니다.

 

2. 인간의 자기 확신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강한 신념과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의 고집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 같은 모습에서 우리의 문제를 엿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베드로에게서 믿음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교회와 자신의 믿음을 자기 스스로 신뢰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문제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31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26:31)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 즉 인간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가는 본성의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자신이 부인된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도 자신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가 향상되고 또 인정되는 것에서 보람과 기쁨을 찾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같은 인간의 본성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는 말로 예수를 끝까지 따를 것을 장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할 수 있다라며 자기 스스로를 믿고 사는 사람의 귀에 너는 안 된다는 말이 들릴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6:34)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26:35)는 말로 끝까지 자기 자신감을 보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그 정도의 인간으로 밖에 안 보십니까?’라는 항변이 담긴 말인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함으로써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기 의지 그리고 신념과 결심 등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모든 것이 실제로는 자기 유익을 따라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래성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자기 의지와 신념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것을 스스로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인도해 줄 목자가 없다 해도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얼마든지 믿음의 길로 갈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믿는 것이고 또 오늘날의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할 수 있다 또는 하면 된다는 등의 말들로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사고방식과 결코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믿음을 말하면서도 스스로 믿음을 부인하고 팽개치는 양면의 모습을 보게 될 뿐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사고방식은 자기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고 하는 자기 의지와 신념에 의한 자신감으로 가득한 사람이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사람이 사회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때문에 사람은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다라며 자기 최면을 통해 자신감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자신감으로 살아간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심리적 요소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라는 말들은 믿음을 말하는 교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스스로 믿음을 부인하고 자기 결단과 의지와 결심으로 스스로를 책임지는 불신앙의 종교집단으로 전락하는 결과일 뿐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3. 인간의 믿음

이런 자기 신념과 자신감으로 가득한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하나님이 기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생각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 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울 왕의 면류관과 팔찌를 들고 와서 자신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아말렉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말렉 사람이 이런 거짓말을 하는 까닭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그런 사울 왕을 죽였다고 하면 다윗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그래서 다윗에게 뭔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말렉 사람은 자신이 한 그 거짓말로 인해서 결국 목숨을 잃게 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윗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한 거짓말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잃게 만든 것입니다.

사무엘하 4장에도 보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삼하4:8)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레갑과 바아나라는 두 형제가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사울 왕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틈을 이용하여 그를 죽이고 그 목을 베어서 다윗에게로 가져오며 한 말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이스보셋을 죽인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을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를 갚으시기 위하여 자신들로 하여금 이스보셋을 죽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행위가 다윗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 생각 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원수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죽였으니 다윗도 기뻐하면서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아말렉 사람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다윗의 분노와 죽음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가에 대한 무지의 결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도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7:22)라고 합니다.

주의 날에 많은 자들이 주님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행위는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박수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는 동안 선지자 노릇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에는 주님께 주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하면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주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3)고 하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이들도 앞에서 살펴본 아말렉 사람과 레갑과 바아나 형제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무엇을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지에 대하여 무지했던 것입니다. 자기 신념과 확신에 가득 차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서서 칭찬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한 자신들의 그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신념과 자신감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굳이 예수님이 오실 이유는 없습니다. 죄든 의로움이든 간에 인간이 책임지고 이루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인간은 분명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로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이 문제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4. 주안에서의 삶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절대로 예수를 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군다나 닭 울기 전에, 다시 말해서 새벽이 가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예수님께 서운함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강하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는 상황이 되자 자신의 다짐과는 다르게 예수를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자신 있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드린 말씀은 사라지고 오직 위험에서 자기 스스로를 구하는 것만이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다른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려움에 떨면서 숨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에게 믿음은 가당치도 않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행하면서 하늘의 말씀을 들었고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 많은 이적들을 보고 체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6:13)고 묻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6:14)라고 답을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으로 인해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고 물으실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답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베드로와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고 믿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없고 예수를 알지 못한 자와 다르지 않은 모습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앎이 지식과 정보의 수준이 아니라 믿음이고 성령의 지혜라면 반드시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며 자신의 실체와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또 그 죄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게 되면 로마서 3장의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고 하는 말씀이 바로 자신의 실상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7장의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7:18-19)는 말씀 또한 자신의 실상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앞에서 또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실상과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절대로 내가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곧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책임지고자 하는 교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말로 교인들을 선동하는 것은 교인들을 모두 교만으로 끌어가는 악한 행위일 뿐인 것입니다. 교인들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며 교회로 돌아올 이익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생명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16)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9:17)고 하시며 “18.~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9:18-19)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자신 있게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율법에 대해 자신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고 말씀하셨고 그는 재물이 많음으로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결국 그 청년의 자신감도 재물을 버려야 하는 문제에서는 무용지물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3.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9:23-24)고 하십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부자는 재물이 많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타인보다 우월적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믿음에서도 타인보다 더 믿음이 있는 자로 인정받고 싶고 그래서 타인보다 더 우월한 자리에 있고 싶은 욕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말씀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 지식으로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하고 또 스스로에게도 만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장담에서도 역시 좀 더 우월할 위치를 확보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힘을 고집하고 자기 의지와 신념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늘 생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버리게 되는 것까지 우리의 뜻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에 대해서는 우리가 첨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고집하는 것이 생명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버려지는 길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해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이 또 그 믿음의 주인이신 우리 주께서 우리를 붙드심을 온전히 누림으로 남들보다 우월하고자 하고 또 남들보다 인정받고자 하는 어리석고 무지함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직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지는 주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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