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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형제

본문 / 2:11-16

 

1.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을 형제와 자매로 호칭하는 것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형제와 자매란 공동체의 관계를 뜻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서로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 형제, 자매라는 호칭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공동체 관계를 알지 못하고 무시한 채 형제, 자매로 호칭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말 그대로 그냥 기독교적 호칭으로 통용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라는 관계가 또 자매라는 관계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관계 되어진 것인지를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2:11)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죄 없는 거룩한 자로 여김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이 한 근원에서 났다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형제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함을 입은 자는 형제의 관계에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거룩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형제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예수님의 형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형제 아니면 형제 아닌 자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라는 증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거룩해졌음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 즉 나의 어떤 행위와 노력과 열심으로가 아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거룩해졌음을 믿는 예수님의 형제라면 인간의 의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자는 자신의 어떤 행함도 바라보지 않고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는 교회가 많지만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매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그 교회가 지옥과 상관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즉 교회가 노아 시대의 방주가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의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의 마음에 합한 교회를 만든다고 해도 하나님이 교회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의 형제가 되어주시고 또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와 형제 관계가 되어주신 것은 사실 예수님께는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형제 관계가 되실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며,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더러운 존재라는 것이 또한 그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있는 부끄러움의 자리로 내려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죄인의 자리로까지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낮은 우리를 바라보시고 형제로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더러운 자리로 낮아지셔서 형제로 불러주셨음을 생각하다면 예수님과 형제 관계에 있는 신자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낮아지신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 또한 높아짐에 뜻을 두지 않게 되고 또 높아지기 위한 길로 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관계에서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형제, 자매는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낮아짐을 학인하는 관계로 함께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섬기는 교회인 것입니다.

 

2. 형제가 되심

다시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2:1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거룩하게 하셔서 형제가 되어주신 신자들에게 주의 이름이 선포된다면 어떤 반응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거룩하신 주의 이름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이름이 부인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자신이 죄 없는 거룩한 자로 여김받게 되었고 또 그 거룩으로 인해서 예수님과 형제 관계에 있게 되었으며 천국에 속한 자가 된 모든 내막을 알게 되었다면 당연히 자신의 불의한 이름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되며 주의 이름만 높일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이름, 즉 주의 행하심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행하심 앞에서 우리 자신의 행함은 하찮은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향하심과 견줄만한 우리의 행함은 결단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구제를 위해 내어놓았다 해도 예수님의 행하심과 견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구제로도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의 이름 앞에서 서로의 행함을 비교하고 저울질하며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선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형제가 되어주신 신자들의 모임인 거룩한 교회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의 형제로 세워지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보다 교회의 이름에 더 집착하고 또 사람의 이름을 높이고 또 높임을 받는 일에 더 치중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이런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과 분노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내 교회는 바르다는 것은 없습니다. 내 교회는 바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주의 이름이 선포된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친분관계와 형식 등을 기준으로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는데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 등을 기준으로 교회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주의 이름으로 판단되어야만 합니다. 주의 이름이 선포되었을 때 선포 되어진 그 거룩하신 이름 앞에 그 선포를 들은 자들이 불의하고 더러운 자로 나오게 되며 주의 은혜만을 높이게 되는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가 바르다는 것은 주의 이름 앞에서 용납될 수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부터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2:14-15)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에 속한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의 세력에 잡힌 바 된 우리를 구출하시고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형제가 되어주신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한 주의 이름 앞에서 자신을 죽음의 세력에서 구출하시고 자유하게 하신 크신 은혜만 바라보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앞에 12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주를 찬송하게 됩니다. 무슨 찬송이겠습니까?

앞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선포 되어진 그 거룩하신 이름 앞에 그 선포를 들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의하고 더러운 자인가를 알아 주의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려 오직 주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하는 고백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찬양인 것입니다.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자녀 됨이며 예수님이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형제에게서 나타나는 신자 됨의 속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에서 형제의 관계는 단순히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호칭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형제와 자매의 관계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의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라면 그 교회는 교인 수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로 연결된 한 몸이 아니라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지극히 개인적 관계에 머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가 아닌 그냥 종교집단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점검하고 확인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 참 형제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다면 그들은 형제의 관계로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는 수를 따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명이 모이든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것 때문에 형제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임의 수에 관심을 두는 것은 주의 이름을 외면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종교집단으로 전락된 거짓 교회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들이 형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가?’입니다. 자신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주의 이름에 생명이 있음을 알고 부르는 그들이 참된 형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죄를 실감하고 따라서 예수님의 용서만이 나를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깨닫은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교회가 모여서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구하게 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반드시 그들의 그런 기도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고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용서를 근거로 하는 모임입니다. 그런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할 것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안 되는 불쌍한 존재로 여기면서 주의 용서로 그를 기뻐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고 예수님은 반드시 그들 중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도 함께 나눴던 마태복음 10장에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4-36)고 합니다. 여기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새로운 관계를 세우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하게 혈과 육을 지니시고 죽음의 세력에서 건져주신 은혜로 구축된 관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형제의 관계에 있게 된 교회로부터 마땅히 증거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죽음의 세력에서 구출하기 위해 우리와 동일한 혈과 육을 지니신 것처럼 우리 또한 낮아진 자리에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입니다. 세상에서의 존재 위치나 소유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모두가 낮은 자리에서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형제 관계에 있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2)고 하는 심각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 라가머리가 빈 바보라고 하는 모욕적인 욕입니다. 형제에게 이러한 욕을 한다면 그것은 그를 자신보다 힘없는 자로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에게 욕을 한다면 그에 따른 보복과 함께 대가를 치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제에게 욕을 한다면 그를 그리스도의 형제가 아닌 함부로 해도 되는 약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형제는 위해 죽으심으로 그를 그리스도의 형제 되게 하셨습니다. 나 또한 그런 존재라는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노래하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실체를 아는 자라면 그 누구도 내가 함부로 해도 되는 약자로만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 그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를 바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형제에게 욕을 한다면 결국 그는 주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기에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으로 자신이 어떠한 은혜를 입었고 어떠한 사람을 받았는지를 아는 신자에게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과 형제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가 예수님이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존귀한 자리에 있음을 아시고 우리 교회가 형제 관계로 증거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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