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7,840
오늘 : 35
어제 : 270

페이지뷰

전체 : 78,693,326
오늘 : 2,523
어제 : 9,505
조회 수 18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사탄의 충동과 하나님의 뜻

본문 / 대상21: 1

 

1. 사탄과 죄

오늘 본문에 보면 사탄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사탄이 등장한다는 것은 사탄이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실재하는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사탄이 실재한다면 신자는 사탄이란 존재에 대해 바른 이해가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의 믿음이 가능한 것처럼 사단의 존재에 대해 바른 이해가 있어야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또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는 죽은 자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크게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사탄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신관에 빠지게 하여 참 하나님을 못 믿게 하는 것이 사탄의 활동인 것처럼 사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왜곡된 개념을 갖게 함으로서 무엇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확실한 것은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는 죄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배운 것이 죄에 대한 것이고, 훈련받은 것이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배우고 습득하게 되는 죄는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죄가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도덕적 삶에서 어긋나지 않으면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사탄의 충동

오늘 본문을 보면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고 말합니다. 사탄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계수하도록 충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하는 것이 곧 사탄의 충동을 따르는 죄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계수하는 것은 백성의 수를 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수를 세는 것이 왜 사탄의 충동을 따르는 죄가 되는 것입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얼마든지 백성의 수를 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백성의 수를 센 것이 문제 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백성의 수를 세도록 충동하는 의미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5절에 보면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대상21:5)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 왕은 단지 백성의 수효를 세는 것이 아니라 칼을 뺄 만한 자, 즉 전쟁을 할 수 있는 군사의 수를 세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탄의 충동인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것은 사탄의 충동을 따른 것이고 따라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계수한 것이 단지 백성의 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군사의 수를 세는 것이라 해도 세상의 시각에서는 그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면 당연히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확인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오늘날의 교회가 교인 수를 세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교인 수를 세는 것을 가지고 죄다 또는 죄가 아니다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법을 세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의 수를 세지 않는 것을 교회다운 것으로 여긴다면 교인 수를 세지 않는 교회는 우리는 교회답다라는 자랑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인 수를 세지 않는 것이 또 다른 의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모습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비난의 이유가 될 때 우리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또 어느 교회는 담임목사의 당회장이라는 권한으로 인해 여러 가지 폐해가 발생하게 되니까 당회장 직을 목사만 하는 게 아니라 장로도 하는 것으로 규약을 정함으로 마치 개혁을 추구하는 교회다운 교회로 보이고자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탄의 충동에 따른 죄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사탄의 충동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하고 교회를 보게 합니다. 죄의 세력에 붙들린 죽음의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에게 의가 되어 거룩한 자로 여김받게 하였음을 믿는다면 끝까지 은혜에 붙들린 자로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의가 되심을 잊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의 의의 조건이 결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 해서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장로도 당회장을 하는 것으로 규약을 정함으로서 목사의 권위를 제지한다 해도 그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을 교회다운 것으로 여긴다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로움이 됨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곧 사탄의 충동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죄의 기준을 행함에 두고 규정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앙인답게 행한 것이 선한 것이고, 신앙인답지 않은 것을 죄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기도하지 않고 헌금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할 죄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단절시키고자 하는 사탄의 충동을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탄이 의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의 행동을 한다 해도 그로 인해 지옥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단절되는 것이 곧 죽음에 이르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의도와 충동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은혜를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은혜에서 멀어지고 단절되는 사태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존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하심

역대상 2114절에 보면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더라”(대상21:14)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이스라엘 백성 칠만 명을 죽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것이야말로 심판을 받아야 할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계수는 단순히 숫자를 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힘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고 또 정치를 잘했고 많은 업적을 세웠다는 자기 확인이라고 할 수 있고 자기 과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단절된 은혜와 상관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대상 217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대상21:7-8)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셨을 때 다윗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되고 회개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다면 끝까지 자신의 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다윗이 왜 사탄의 충동을 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성 자체가 자신을 향하도록 되어 있기에 사탄의 충동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죄를 범하지 않는 존재가 되도록 일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 백성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라면 다윗이 사탄의 충동을 따를 때 막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요압의 말을 듣고서도 자기 행동을 간파하지 못하고 사탄의 충동을 따를 때 가만히 계셨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죄를 범함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배우는 기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이스라엘을 계수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충동을 따르는 다윗은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에 붙들려서 왕으로서의 자기 업적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다윗이 사탄의 충동에 의해 이스라엘을 계수한 이야기는 다윗 한 사람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사탄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어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두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드러나고 확증된 은혜의 세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인정되고 드러나는 것을 인생의 의미로 여기는 사탄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충동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이 인정되는 것만큼 뿌듯하고 즐거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늘 사탄의 충동을 따라 삽니다. 이런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하신 덕분인 것입니다.

세상은 사탄의 충동 아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세상을 사탄의 충동 아래 두시고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충동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탄이 충동하는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큰 은혜와 사랑으로 나타나고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충동 속에서도 복음을 듣게 되는 백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사탄의 충동 속에서도 복음을 듣는 백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권능으로 활동하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듣는 귀를 주심으로 복음을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이 곧 사탄이 충동하는 세상 속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곧 하나님의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주의 증거물 되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누리며 맛보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인생이시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30 2023 1월 29일 / (민4:1-3) 신자의 봉사와 세상의 봉사 관리자 2023.01.29 103
629 2023 1월 22일 / (고후 9:6-9) 하나님 안에서의 연보(헌금)  관리자 2023.01.29 162
628 2023 1월 15일 / (계13:9-10) 신자의 인내와 즐거움 관리자 2023.01.15 128
627 2023 1월 8일 / (히 2:11-16) /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형제 관리자 2023.01.08 122
626 2022 1월 1일 / (출32:25-29) 하나님 편에 선 자의 헌신 관리자 2023.01.01 154
625 2022 12월 25일 / 성탄절 (눅2:8-14)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관리자 2022.12.25 156
» 2022 12월 18일 / (대상 21:1) 사탄의 충동과 하나님의 뜻 관리자 2022.12.18 187
623 2022 11월 27일 / (레 11:4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관리자 2022.11.27 296
622 2022 11월 20일 / 추수감사절 / (히 13:7-8) 진정한 감사의 추수감사절 관리자 2022.11.20 224
621 2022 11월 13일 / (마 6:14-15) 용서 관리자 2022.11.14 230
620 2022 11월 6일 (창 6:17-22) 하나님의 언약과 내용 관리자 2022.11.06 281
619 2022 10월 30일 / (마 26:33-35) 하나님의 믿음과 인간의 신념 본문 / 마26:33-35 관리자 2022.10.30 232
618 2022 10월 23일 / (마 7:13-14) 좁은 문과 넓은 문 관리자 2022.10.23 267
617 2022 10월 16일 / (엡 5:8-9)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관리자 2022.10.23 287
616 2022 10월 9일 (히 11: 39-40) 믿음의 온전함 관리자 2022.10.09 279
615 2022 10월 2일 / (요 8:31-36)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관리자 2022.10.02 295
614 2022 9월 25일 / (딤전 1:18-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관리자 2022.09.25 305
613 2022 9월 18일 / (마 16:23-25) 자기 부인과 그 목적 관리자 2022.09.18 285
612 2022 9월 11일 / (마 7:21-23)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믿음 관리자 2022.09.11 273
611 2022 8월 21일 / (요4:19-24) 영과 진리의 예배 관리자 2022.08.21 35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