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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본문 / 1: 1- 3

 

1. 계시록의 시각

오늘부터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나눌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장차 주어질 천국, 즉 내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실상은 구약의 모든 선지서들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66장에 보면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66:22)고 합니다. 여기 보면 이사야서를 마치면서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란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눌 요한계시록에서는 누가 진정으로 남은 자이며 그리고 그 남은 자를 괴롭히고 세상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배후 세력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를 포함한 모든 선지서는 세상의 멸망을 말함과 동시에 영원한 메시아의 나라를 말하고 있고, 요한계시록은 세상이 왜 멸망을 당해야 하는지를 말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 즉 영원한 메시아의 나라에서 그 이름이 영원히 있을 진정한 남은 자란 어떤 자인가를 어린양을 중심으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선지서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무엇을 설교하든 그리스도를 말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리스도를 말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법칙과 근거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일정한 틀을 따라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벗어난 그리스도는 이미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 역시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하고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 말씀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식으로 성취되며 또 그 언약의 성취 속에 포함된 언약의 백성, 즉 남은 자란 어떤 자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나누면서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절대로 자기 구원을 기준으로 해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요한계시록이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으로 분류되고 또 많은 잘못된 해석을 낳고 있는 이유가 '자기 구원'을 기준으로 해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 보이는 세상은 보이는 세상대로 즐겁고 재미있게 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대로 확보하려는 탐욕을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이 세상 속에 이미 시작된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내는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구원에 집착한 채 성경을 보게 되면 믿음은 천국을 들어가기 위한 수단적인 믿음이 돼버릴 것이고, 인내 역시 내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버티는 오기가 돼버릴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보지 마십시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 역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구원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곧 우리를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배워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나의 구원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다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구원을 작정하셨다면 왜 애당초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는 것이겠습니까? 바깥으로 쫓아내서 정신 좀 차리게 한 다음에 들어오라는 것이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쫓겨났다고 해서 정신 차릴 인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인간이 쫓겨난 자기 상태를 깨닫고 스스로 정신 차려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자질이 있다면 예수님은 괜히 세상에 오셔서 고생한 꼴이 돼버립니다. 한번 쫓겨난 것은 영원히 쫓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쫓겨난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깨어진 자기 창조의 세계를 완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이 구원을 기대하고, 구원을 원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어떤 자인지 그 본질과 처지를 망각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구원에 빠진 자는 결국 성경의 모든 내용을 자기 구원을 기준으로 해서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경을 이용하여 장사하는 자들이 범람하게 된 것이고 또 그들을 옹호하는 무리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나 성경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허구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이 허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려고 애를 쓰는 헛된 목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구원을 주려고 애썼던 그 일을 이스라엘이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자기 구원을 위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사람에게 구원을 주려고 애를 쓰는 목회를 하다 보니 결국 '이렇게 하면 칭찬 듣고 이렇게 하면 책망 받는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은혜를 말하면서도 '공짜'라는 말에 대해서는 고개를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받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자기 행동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도록 내 편에서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다는 의도에 의한 행동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성경 보고 기도하고 봉사하는데 설마 나를 구원하시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 자기 구원을 위해서 준비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말하는 소위 목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속죄 제물되신 예수님의 완전성을 무시하는 행위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셨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 사람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잠만 자고 놀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를 데려 가실 것 같습니까? 일반 상식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는 사람을 데려가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보고 기도하는 사람을 데려가시는 것도 아니고, 잠만 자고 놀고 있는 사람을 데려가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속죄 제물 되셨다는 완전성을 믿는 사람을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고 성경보고 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잠만 자고 있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피 흘리셨다는 완전성을 믿는 것, 이것이 천국 가는 자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었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으로 이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으로 택한 자이기 때문에 믿음을 선물로 받았고, 그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성을 믿는 모습을 드러내게 한 것으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설명을 굳이 드리는 이유는 믿음의 상태를 인간이 쪽에서 만들어 내려는 의도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성경 본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되면, '그래 맞다. 누가 기도하고 성경 봐야 천국 간다고 말하느냐?'고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신자는 기도하고 성경을 봐야 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신자의 믿음의 상태를 기도하고 성경 보는 인간의 종교 생활에 두기 때문입니다.

속죄 제물의 완전성이란,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뭔가 준비하고 보태야 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이 말씀 한마디는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위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성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가 '내가 이렇게 해야 은혜가 주어지고 이렇게 해야 복이 주어진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속죄 제물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속죄 제물의 완전성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또는 안 하고 와는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편에서 은혜를 주시고, 구원을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인간의 행위를 보면서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속죄 제물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세움 받은 사람이지 자기 자신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세워진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 생활과 정성과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러한 것이 증인의 모습이 아님을 명백히 말해줍니다.

요한계시록에서의 증인의 모습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함께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언약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함께 나누면서 어떤 자가 언약 백성, 즉 남은 자인가를 명백히 알게 될 것입니다.

 

3. 계시와 오해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사도 요한이 받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계시를 받기 위해서 뭔가 대비를 했다는 말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10절에서 말하는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10)라는 말씀을 이용해서 여기 주의 날을 오늘날 주일이라고 말하며 요한이 주일을 지켰기 때문에 성령에 감동을 받았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해석들이 자기 구원에 집착한 자의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절의 말씀을 다룰 때 다시 자세히 언급은 하겠지만 여기 말씀하는 '주의 날'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주일'이 아니며 또 주일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무슨 은혜를 가져다주고 복을 받게 하는 통로나 수단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은 그냥 밧모섬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계시를 그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즉 계시는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이지 계시를 위해서 인간 편에서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거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의 계시이지 계시받은 요한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이 함정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이 계시를 받은 것처럼 또는 사도들이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일으킨 것처럼 그리고 한번 설교하니 삼천 명이 회개한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어떤 기적을 행했다면 그것을 예수님을 보여주는 계시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똑같은 기적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든 사도들이 병을 고치든 그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 기적적인 사건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합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 자체가 표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기적적인 사건을 표적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결국 그것은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나도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궁리해 낸 것이 기적이 일어났던 그때 그 상황과 똑같이 만들면 나에게도 능력이 임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계시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려는 것이고 또 계시를 자기 소유화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새벽에 기도하다가 은혜받았다고 해서 '새벽 기도해야 은혜받는다'라고 해버리면 새벽기도가 은혜의 통로가 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는 새벽 기도하다가 은혜받을 수가 있고, 누구는 설거지하다가 은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는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받는 게 아닙니다. 만약 인간이 무엇을 해서 받는 것이라면 이미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시이지 우리들의 종교 체험이나 경험들은 전혀 계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 체험이나 경험을 계시화 하고 싶은 유혹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성경을 손수 기록해서 전체를 다 기록하고 나니까 놀라운 은혜가 주어지더라고 해버리면, 인간이 손수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 계시가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고정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나도 그렇게 하면 은혜가 주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계시가 주어지고 은혜가 주어지는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시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이 인간의 경험을 계시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흔히 이단이라고 정죄 된 무리 중에 지방교회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잘못은 신자가 은혜받은 상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은혜가 충만한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형제같이 서로 사랑하며 지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또 교회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말에 빠지기 때문에 소위 서로 사랑하고 형제같이 지내는 이상적인 교회의 상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모방을 하게 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여서 기도회를 많이 한다든지, 야유회나 수련회 같은 교제의 시간을 많이 가진다든지 함께 모여서 복음 성가를 자주 부르고 찬양의 밤 같은 시간을 많이 만든다든지, 이렇게 인위적인 방법과 모방과 노력을 동원해서 스스로 은혜의 상태를 만들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면 '우리 교회는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낙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지 성경을 읽는 우리가 중심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광의 나라를 회복하시는데 관심이 있지, 우리가 성경을 보고 안보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성경을 많이 보는 신자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관심도 여기에 두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의 죄로 더러워진 창조세계를 깨끗하게 회복하시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뭘 못했다고 해서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4. 종의 삶

다시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1:1)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도 새로운 계시를 따로 만들어서 요한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렇다면 속히 되어질 일이라는 것도, 결국 미래에 되어질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히 되어질 일'을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의 시간적인 의미로서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눈에 보이는 역사 세계의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버리기 때문에 계시록을 장차 미래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되어질 일들로 결론지어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히 되어질 일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이 성취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진 약속이라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란 철저하게 어떤 한 통로로만 흐르고 있는 물줄기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통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요한에게 계시를 했다고 해서 요한이 뭔가 다른 것을 더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요한이 보고 들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진 약속이었습니다. 그것을 증거 하라고 요한이 종으로 세움 받은 것입니다. 자기의 체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진 그 일에 대해서만 증거 하는 것이 종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1:2)고 말합니다. 요한이 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였습니다. 오직 그것만 증거 하는 자가 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거나, 예수님을 만나서 계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예 그럴 필요성이 없습니다. 이미 사도들을 통해서 계시되어진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깨달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구약의 약속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도 성취되었다면 우리는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본 것을 통해서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증거 하면 되는데 또 다른 무슨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진 약속 자체를 말합니다. 그래서 부탁드릴 것은 은혜받으려고 애쓰지도 마시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도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이 하신 일만 바라보고 그것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이면 됩니다.

마지막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고 합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있고, 듣고 있고, 이해하며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은혜 주실 때 은혜 주시면서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진 일이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계시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뭔가 더 다른 것을 추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다 하셨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 완성되었다는 것이 계시이며 그것을 그대로 증거 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종임을 알아 오늘도 주신 은혜를 열심히 나누며 사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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