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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 편에 선 자의 헌신

본문 / 32:25-29

 

1.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기독교 초기에 발생했던 이단 중에는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여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하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한 영지주의가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거룩한 영과 동물적인 혼과 물질적이며 죄악에 물든 육체()로 구성되었기에, 영은 절대로 죄에 오염되지 않고 오직 혼과 몸만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영적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죄를 범하고 삶이 방탕하더라도 죄와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단 중에 극단적인 바울의 추종자라 할 수 있는 마르키온(마르시온) 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영지주의처럼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했고 철저하게 반유대주의자들로 구약을 근본적으로 거부했던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대주의자들로 여겼기에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직 바울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진정한 사도로 여겼습니다. 또한 이들은 구약을 거부했기 때문에 자연히 구약의 하나님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구약에도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했음을 인정은 했지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각기 다른 존재로 분리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전쟁과 피를 좋아하고 변덕스럽고 복수심이 강하며 자의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 말했습니다. 즉 구약의 하나님은 악의 창조주임과 동시에 오직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만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편협한 신이며 다른 인류는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파괴해 버리는 독재적 존재로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비록 자기 백성이라 해도 죄를 범하면 진노하고 죽이는 변덕과 복수심으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 마르키온(마르시온) 파가 인식하는 구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사실 구약의 내용을 보면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장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시고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면서 그 모든 것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는 것부터가 변덕스럽고 사랑이 없는 신으로 비춰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존재 또한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창조에 실패한 열등의 신으로 전락시키기에도 좋은 구실이 되기에 이런 점들을 내세워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를 공박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내용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모세가 레위 지파를 내세워서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삼 천명 가량을 죽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난처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분으로 믿고 있는데 동족 삼 천명 가량을 도륙하고 그 일에 대해 모세는 오늘 본문에 보면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32:29)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동족을 삼 천명이나 도륙한 일을 여호와께 헌신하고 복 받을 일로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2. 인간이 만든 하나님과 참 하나님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율법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에 올라간 모세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불안해했습니다.

출애굽기 321절에 보면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32:1)고 말합니다. 모세가 없는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백성들이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금고리를 빼어 가져오게 하여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아론도 백성들의 요구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론도 모세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홀로 백성들을 인도해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불안감을 느껴서 백성들의 요구에 동조했을 수도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아론은 4절 후반부에 보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32:4)고 말하고 그 앞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먹고 마시며 뛰놀게 됩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율법이 새겨진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고 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진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32:26)고 하자 레위 자손들이 모세에게로 나오고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32:27)고 말함으로 레위 자손이 동족 삼 천명 가량을 도륙하는 비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레위 자손이 형제와 친구를 도륙한 일을 여호와께 헌신한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레위 자손과 같은 헌신을 하려면 형제와 친구라 할지라도 우상을 섬긴다면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까? 물론 누구도 그런 의미로 이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이해한다 해도 실행에 옮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 자손의 헌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헌신의 의미를 자신의 몸과 물질을 아끼지 않고 바쳐서 섬기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신자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든다라고 말하면서 헌신이 신앙의 증거물인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이 신자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든다는 말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닙니다. 헌신이 없는 신앙은 결국 관념이거나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는 야고보의 말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헌신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헌신을 자신의 재물과 몸을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바쳐서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신앙이 신자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든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그러한 헌신으로 끌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레위 지파를 내세워서 형제, 친구라는 관계를 초월하여 삼 천명을 도륙하게 한 것은 양보와 타협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를 위한 도륙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도륙인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말한 헌신의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흔히들 이해하고 있는 헌신의 의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은 자기를 위한 헌신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자신의 몸과 재물을 바쳐 헌신한다고 하나 그 속 배경에는 자신의 헌신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 보상으로 복을 기대하는 것이 감춰져 있습니다. 또한 헌신으로 자기 신앙이 인정받는 것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헌신의 중심에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 만든 신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론에게 요구한 것도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한 자기의 신을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뜻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신을 만들고 미래를 맡김으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종교인들이 신을 찾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십니다. 이사야서 48장에 보면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8:11)고 하며 또한 에스겔서 36장에도 보면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6:22-28)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럽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 편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인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 지음받고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또 자신의 영광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영을 주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이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까지도 자기 목적을 위해 찾고 부를 뿐입니다. 그것이 자신들을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춤추며 노래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누구신가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하나님을 만든, 즉 금송아지를 만든 그 백성들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그리고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을 여호와께 헌신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3. 여호와께 헌신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0:34)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불편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당황스럽고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삶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웃과 화평하고 가족끼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그런 행복을 도무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황스럽고 불편한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까?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있는 자로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화평케 하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14장에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14:19)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신자가 힘써야 할 일에는 화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까? 신자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신자 역시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화평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에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2:14-15)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상이 원하는 화평과 예수님이 주시는 화평이 다를 뿐인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화평은 인간의 결속입니다. 서로 가족 같은 관계가 되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인간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을 이루어 주는 맞춤형 예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도우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고 기독교의 정신이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결속을 깨뜨리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5-36)고 하는 말씀도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교가 달라서 가족과 실제 원수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혈족 관계까지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인간의 결속을 인정해 주시며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라고 하는 것이 더 예수님다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에서의 인간의 행복을 위해 오신 예수로 존재해 달라는 요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영생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싫은 것입니다. 세상은 그냥 우리끼리 잘 지내며 잘먹고 잘살기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복음은 싫은 것입니다. 자신의 관심과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이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여느 종교의 신처럼 인간의 화목을 가르치고 세계 평화를 가르치면 다른 신과 똑같은 신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끼리의 관용은 사랑도 아니고, 화목도 아닙니다.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말고 모두 나름대로의 진리를 추구하는 같은 종교로 존재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예수님의 정신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말로 착함을 가장한 사단의 계략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화목한 가족이라는 끈끈한 관계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증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가족과 불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는 새로운 가정, 새로운 관계를 이루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12:50)는 말씀으로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임을 알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름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여호와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를 위해 신을 만들고 섬기는 것은 도리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멸을 받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것을 삼 천명을 도륙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신을 찾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또한 진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여전히 나 중심으로 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고 말씀으로 스스로를 치는 것이 곧 여호와께 헌신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을 심판이 당연한 존재로 여김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증거하는 것이기에 여호와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신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이나 재물과는 무관합니다. 오직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고 또 그 죄로 인해 죽은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다스리는 신자는 무엇을 행한다 해도 자랑할 수 없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주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께 속한 신자가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고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결국 헌신 또한 자신의 행함이 아니며 하나님이 은총의 선물로 주신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기에 헌신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신을 찾는 세상에서 주를 위해 살고 죽는 믿음의 세계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믿음의 세계는 더욱 간절히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2023년 새로운 날들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날들을 왜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매일의 삶가운데서 되새기며 사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 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 허락된 날들 가운데 여전히 어리석고 무지한 모습으로 나를 위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건 아닌지 오늘 말씀 앞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헌신을 자랑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한 해 동안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고 하나님 앞에 참 헌신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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