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7,738
오늘 : 203
어제 : 274

페이지뷰

전체 : 78,684,677
오늘 : 3,379
어제 : 1,300
조회 수 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서머나 교회

본문 / 2: 8-11

 

1. 말씀의 기능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17.~~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7-19)고 합니다. 그렇기에 죄인된 인간에게 있어서 수고와 땀을 흘리는 고생은 당연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수고와 땀은 인간이 죄지은 후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고생함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생 없는 편안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렇다고 고생을 즐기라는 것도 아니고 또 일부러 고생을 찾아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고생을 일부러 찾지 않아도 우리가 숨을 쉬며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생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고생이 있을 때 불평과 원망만 하지 말고 고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고생을 해야 하는가? , 인간이 고생하는 것은 죄인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고생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이런 시각을 가지고 사는 자를 '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생 없는 삶은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란 하나님의 시각에서 세상을 판단하고 사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고생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고생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고생이 인간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은 하나님을 믿는 무리의 모임인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고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에는 고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고생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약속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수고하고 땀 흘리는 고생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인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마치 고생이 면제되고 대신 편안함이 주어지는 것처럼 선전을 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법칙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처사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벌을 받았다는 창세기의 이야기가 마치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쯤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말씀의 효력이 상실해 버린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교회를 찾아오면서 편안한 인생을 기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골만 더욱더 깊어질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주의 몸된 교회가 세워진 것이라면 그리고 그 교회의 지체가 바로 우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지체가 몸의 고난에 대해서 외면한 채 자신의 편안함만 추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항상 남다른 생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내 편안함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 마음을 두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교회 자체를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라는 단체를 주님의 교회라고 해버릴 때, 혹 우리 교회 안에 신자 아닌 자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라는 간판 아래 모이는 교회에는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도 얼마든지 교회 문을 밀치고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님이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주님의 몸된 교회 모습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확인할 뿐인 것입니다.

세상에 말씀이 주어진 이유가 이것입니다.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지 말씀이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존재합니다. 어느 한구석도 세상 사고방식에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사고방식과는 철저히 반대 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세상의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사고방식으로 확연하게 구분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교회에 나오는 자와 나오지 않는 자에 대한 구분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와 나오는 자는 말씀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구분이 됩니다. 교회라는 단체만으로도 구분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은 이미 심판이라는 확실한 구분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너희들 그렇게 하면 심판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드러내신 죄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소위 제사 드리지 않고 제물을 바치지 않는 죄를 지적하고 그 죄를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내신 죄는 소위 신앙 속에 담겨 있는 죄였습니다. 즉 문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신앙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교회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는 믿는다'는 생각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절대로 믿음이 아닌데, 교회를 다니는 자 편에서는 '나는 믿는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말씀이 주어 짐으로서 교회 안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기능인 것입니다.

 

2. 인간의 생각, 하나님의 뜻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2:9)고 말씀합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과 궁핍이 누구 때문에 주어진 것이냐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신자가 아닌데도 '우리는 신자다'고 고집부리는 자들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둘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에 의해서 환난과 핍박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서머나 교회 자체를 교회라고 해버리면, 그 교회 속에 있던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단의 회도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속에 자신을 감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교회라는 울타리를 가지고 자신을 위장하려고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속한 교회의 이름이라고 하는 허울 좋은 껍데기는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소속된 신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가 진짜냐? 내가 진짜냐?'라는 것에 관심을 두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만 참된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서 그 모습에 자신을 비춰보고 확인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주님의 피로 세워진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10)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과연 오늘날 교회에 통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오늘날은 오직 자기 편함에 관심을 두고 삽니다. 교회까지도 오직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한 방편으로 삼고 오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자들을 '가라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위 '알곡과 가라지'가 어떻게 구분되겠습니까? 목사가 이것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신자와 신자 아닌 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도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이 죄를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분은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신 주님이 하실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10절의 말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죽어라'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충성을 하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앞의 8절의 말씀대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신자는 바로 그분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죽었다가 사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죽음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데 고난인들 두렵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사고 방식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편안함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라'고 하고, '죽어라'고 하는데 누가 이 말을 환영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만 보여줍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 덕분에 살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를 도와서 죽어가다가도 살아나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쓰러져 가다가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기적적으로 일어나는 것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쓰러져 가는 자를 더 쓰러뜨려 버리는 하나님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마지막에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관심거리나 되겠습니까? 또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에 관심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관심은 내 한 몸 고생 안 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을 가지고 '우린 믿는 자다'고 스스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 속에 '예수님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고난도 마다하지 말고 받아라'는 말씀이 주어졌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겠습니까? 말씀의 결과는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자와 포기한 자들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고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역할이라면,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설교는 결코 사람을 감싸 안는 기능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목사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에 위로를 받고 감동을 얻고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의 기대에 호응하기 위해서 목사들이 하는 것이 '위로와 치유의 목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듣는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듣는 자의 편이 되어서 말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위로란 누군가가 내 편이 되어서 말을 해 줄 때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위로도 역시 나를 사랑해줌으로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편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인간을 공격하고 들어오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인간의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교인들의 마음을 다독거리겠다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능이지 사람을 감싸 안아주는 기능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란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을 두고 모인 신자라면 목사의 말에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위로를 받게 됩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말씀에 의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위로

다시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0-11)고 합니다.

장차 환난이 있을 것인데 그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죽어라'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충성입니다. 이것이 이기는 자입니다. 죽는 것이 이긴 것입니다.

결국 살고자 하는 인간에게 목사가 할 수 있는 위로의 말이란 '예수님을 믿으면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살려줍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실 위로의 말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고 안심하고 두려워 말고 죽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났고 너도 살아날 것인데 죽는 것이 두려울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에게 고난이 두렵겠습니까? 이것이 신자에게 있을 위로인 것입니다. 죽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둘째 사망 즉 멸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이라는 이 말씀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분명 이 말씀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살려고 하는 자에게는 이 말씀에 대해서 귀를 막아 버리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교회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하시는 일로 여기십시오. '살려고 하지 말고 죽어라'는 이 말씀이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이해가 되어지고 또 내 인생이 그런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 주님의 몸된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느냐 못사느냐는 것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시간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과연 세상에 대해서 죽는 자로 살아가도록 나를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소원의 마음으로 주님을 찾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소원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 것이고, 환난을 당하고 궁핍하나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50 2023 5월 21일 / 요한복음 4. (요 1:14-18) 말씀이 육신 되어 관리자 2023.05.21 6
649 2023 5월 21일 / 요한계시록 12. (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 관리자 2023.05.21 8
648 2023 5월 14일 / 요한계시록 11 (계3:7-13) 빌라델비아 교회 관리자 2023.05.14 12
647 2023 5월 7일 / 요한복음 3. (요 1: 9-13)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 관리자 2023.05.07 10
646 2023 5월 7일 / 요한계시록 10. (계 3:1-6) 사데 교회 관리자 2023.05.07 6
645 2023 4월 30일 / 요한계시록 9. (계2:18-29) 두아디라 교회 관리자 2023.05.07 5
644 2023 4월 23일 / 요한복음 2. (요 1: 6- 8) 증거하러 온 자 관리자 2023.04.23 12
643 2023 4월 23일 / 요한계시록 8. (계 2:12-17) 버가모 교회 관리자 2023.04.23 7
642 2023 4월 16일 / 요한복음 1. (요 1:1-5)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관리자 2023.04.16 13
» 2023 4월 16일 / 요한계시록 7. (계 2:8-11) 서머나 교회 관리자 2023.04.16 7
640 2023 4월 9일 / 부활주일 / (눅 24:1-12) 빈 무덤을 찾는 사람들 관리자 2023.04.09 7
639 2023 4월 2일 / 요한계시록 6. (계 2:1-7) 에베소 교회 관리자 2023.04.02 67
638 2023 3월 26일 / 요한계시록 5. (계 1:11-20)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관리자 2023.03.26 37
637 2023 3월 19일 / 요한계시록 4. (계 1:9-10) 주를 만나는 날(주의 날) 관리자 2023.03.19 118
636 2023 3월 12일 / 요한계시록 3. (계1:4-8) 교회다운 교회 관리자 2023.03.12 127
635 2023 3월 5일 / 요한계시록 1. (계 1:1-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관리자 2023.03.05 147
634 2023 2월 26일 / (딤전 3:9)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관리자 2023.02.26 141
633 2023 2월 19일 / (살후 2:13-15) 진리로 구원받게 하심 관리자 2023.02.22 85
632 2023 2월 12일 / (출15:22-26)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관리자 2023.02.12 131
631 2023 2월 5일 / (딛 1:1-4) 하나님이 맡기신 전도 관리자 2023.02.05 16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