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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말씀이 육신 되어

본문 / 1:14-18

 

1. 성육신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성육신이라는 단어로 줄여서 말하기도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으로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요한복음 11절의 말씀대로 말씀은 하나님이시라고 하시기에 우리는 왜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에 대해서부터 물으며 시작해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뭔가 하실 일이 있다면 그냥 하늘에서 모든 일을 하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 하나만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까? 만약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육신으로 오실 필요 없이 그냥 말씀으로만 우리를 구원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지 천국 보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분명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시는 일이 없이도 그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히 말씀이 육신 되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야 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구원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육신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악을 담고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죄 없으신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죄가 있는 몸이 아니라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난 육신이 죄 있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죄가 없으신 몸입니다. 그냥 죄 없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죄 없으신 몸으로 사셨습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죄 없으신 몸, 즉 하나님 보시기에 참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그리스도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야 했던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인해서 드러난 것은 결국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참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날 때부터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는 우리 입장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하늘에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세상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된 나라입니다. 전혀 다른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하늘은 영원한 생명이지만 세상은 한시적 생명입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을 버리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세상에 오심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에 오셨습니까? 세상에 오셨어도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높임을 받으셨다면 그나마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오되 세상은 빛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아무도 영접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오심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말씀에 대한 순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전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스스로 말씀에 순종한다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하신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내 힘으로 말씀에 순종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곧 말씀이시고,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예수님=말씀=하나님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나 예수님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다른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 되어서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 자기 마음으로 사신 것이고 그것이 순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신자들이 소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할 때 대개의 경우 내가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내 마음이 서로 따로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실천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맹목적인 신앙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히 하라는 명령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불신자에게 하는 명령이 아니라 신자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그럴 때 말씀은 지켜야 할 명령이 아니라 당연히 살아야 할 삶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자로서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산다면 말씀은 이미 명령이 아니라 당연히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미 같은 마음이기에 예수님에게는 굳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식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만약 말씀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곧 하나님의 생명에 함께 함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자신의 일을 도와주기 위한 함께 하심으로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함께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통해서 볼 때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 된 존재이기 때문에 거룩한 의 앞에서는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필히 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이 이스라엘 안에 성막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생명이 무엇으로 연결 되어지는 가를 성막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막에서는 제물의 피가 흘려집니다. 제물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막에 충만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라는 성전에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입니다.

신자는 바로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보는 자를 말합니다. 제물의 피가 흘려짐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에 나아갈 수 있게 된 은혜와 진리를 보고 사는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영광과 은혜의 충만함을 그리고 진리가 무엇임을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의 우리는 바로 그런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아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영광을 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생자 그리스도의 순종을 영광으로 볼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해 영광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역시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은혜

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면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6-17)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는 그 은혜를 받는 자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은혜를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베푸는 것은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은혜를 은혜로 받으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받은 율법은 은혜와 다릅니다. 율법은 받는 자에게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즉 율법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한마디로 복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하지 않으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요구에 개입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죄인 된 우리의 모든 것을 홀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우리에게 은혜이시며 진리인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는 것은 스스로 비참함에 처하심으로 그 비참에 있던 우리를 건지신 은혜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임을 보게 되는 것이며 또한 진리가 무엇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비참함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광된 빛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오신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봤습니까? 그들은 병고침을 보았고, 오병이어로 먹고 사는 것만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이득만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은혜와 진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세상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낮아지신 예수님에게서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보고 계십니까? 독생자의 영광을 보십니까? 만약에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진정 은혜와 진리로 보여지고 또 영광된 것으로 보여진다면, 우리는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영광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는 말씀을 보면 신자는 독생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산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적 행위로 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잘못됨을 범하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진리를 보십니까? 그리고 독생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은혜로 보지 않은 것이 은혜로 보이고, 세상이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영광으로 보여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리는 우리는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진리를 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신 길을 따라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닌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복된 주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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