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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빌라델비아 교회

본문 / 3: 7-13

 

1. 신자 됨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존재의 가치 향상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 인간의 본능은 어떤 인간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거나 감사하며 살지 못하게 합니다. 혹 불의의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을 때는 자신이 살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죽음의 위험이라는 환경이 자신을 위협했을 때 '살았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질 뿐, 죽음의 위험이라는 환경이 사라지게 되면 인간은 다시금 자기 존재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현실에 만족하려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자신의 가치 향상을 위한 능력과 힘이 자신에게 전혀 없음을 감지할 때 나오는 자포자기일 뿐입니다. 그 자포자기도 역시 어느 순간에 힘이 주어지게 되면 그 수그러져 있던 자신의 가치 향상에 대한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존심이 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체면을 따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두는 자신의 가치와 연관이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무너지는 일을 겪을 때 인간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가 인간의 눈을 밝게 하고 하나님같이 되게 해 주는 효능이 있다는 말을 사단으로부터 들었을 때, 선악과가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는 단지 맛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 향상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효능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유혹에 빠져 사는 모든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가치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가지고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자신에게 선한 것이고,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은 악으로 판단하며 스스로 선악의 선택을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해 줄 수 있는 것을 찾아갑니다.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을 자신이 소유함으로서 자기 가치가 향상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이 모두가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물질을 통해서 자기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인간애라고 생각하고, 도덕과 윤리를 추구하며 누구보다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6:24)'는 것도 역시 인간의 이러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재물 자체를 섬기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단지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이 자체가 자신의 가치를 향상 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 지니고 있는 힘이 자신의 존재를 가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돈에 매료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존재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사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오심이 세상 인간의 생각과 극렬한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즉 가치관의 대립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6:19-20)고 합니다. 예수님은 땅의 것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가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땅의 것을 마음에 두고 사느냐? 아니면 하늘의 것을 마음에 두고 사느냐에 의해서 가치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10:37-38)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나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분이기에 아버지의 아들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면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하기 이전에 '나는 예수님의 일을 행하며 사는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존재 가치는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고, 신자의 존재 이유 역시 예수님의 일을 행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자신의 가치성을 땅의 것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즉 돈을 많이 소유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거나 아니면 도덕적인 행동과 인간애를 통해서 신자로서의 가치 향상을 꾀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가치는 멋있는 예배당과 많은 수의 교인들, 넘치는 재정, 구제와 선교 사회활동 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보시는 신자와 교회는 어떤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교회 됨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빌라델비아 교회가 책망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의미를 두면 안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일곱 교회에 있었던 사건들과 모습들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 일곱 교회를 자랑하고 높여주고 책망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어떤 모습이 주님의 몸된 교회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 자체를 칭찬하고 높인 것이었다면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회를 유일하게 책망할 것이 없는 모범적인 교회로 보신다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지금도 왕성하게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는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은 지상에 세워진 교회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를 내가 몸 담고 있는 교회를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나오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교회를 나오되 내가 다니는 교회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의미를 둡니다. 내 교회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내 교회의 가치가 높아 짐으로서 그 교회를 출석하는 나의 가치 역시 자동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이미 자기 과시의 도구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적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또는 교회의 크고 적음에 관심이 없다면 그보다 고차원적이라고 생각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회, 즉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돕고 좋은 일도 많이 하면서 모이는 교회 되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회를 출석함으로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향상된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시각에서 교회의 자랑거리란 무엇입니까? 교회가 무엇을 과시해야 합니까? 당연히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로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 주님만을 사랑한다는 것 외에 자랑거리가 될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으로 자기 교회를 자랑하는 것을 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정신만 따라간다는 것이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자랑한다고 해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가치 있게 봐주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내세울 수 없고 그것으로 자신을 과시한들 오히려 비웃음만 살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이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주님께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3:8)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적은 능력이란 적은 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 수도 적고 돈도 없어서 힘이 없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로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생존에 위험을 가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존에 위험이 오게 되면 자연히 자신을 지키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평소에는 용납이 되던 것도 자신의 생존이 위태롭게 될 때는 용납을 하지 않고 밀쳐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이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듣기에 거북한 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왜 그렇게만 말을 하느냐'고 반발을 하는 분이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있어서, 진심으로 복음을 알기 때문에 모든 말이 수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반발이 되고 수용하기 거북한 말인데도 목사가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냥 참고 있는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좋은 도구는 교회의 존재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에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한둘씩 빠져나갈 때 그리고 아울러서 재정이 줄고 또 교회 유지 자체가 위태로울 때 우리의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생존에 위험에 올 때 목사를 찾아와서 '설교가 너무 심해 교인들이 빠져나가고 교회가 안 되니까 이제 좀 그런 말은 그만해 주세요'라고 하면, 비로소 '주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했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지키려고 했구나'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에서 많은 분들이 떠났습니다. 또 재정이 적다고는 하지만 교회를 유지하기에는 지금까지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를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라고 보지 않습니다. 살아가기에 문제가 없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복음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문 닫아야 할 상황까지 밀어붙였을 때 그때도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망하는 자리까지 밀어붙였으면 하는 마음도 없진 않지만 인간적으로는 싫습니다.

이런 말이 듣기 거북할 것이고, 심한 말로 들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의 존재 여부가 아닙니다. 교회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을 교회로 인정하실 뿐이지 교회를 세우고 지키고 유지하고자 힘쓰는 인간의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교회에 매이지 않고 교회를 보지도 않고 교회에 의미를 두지도 않고 교회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지도 않고 오직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라는 정신을 가지고 모일 때 비로소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리스도지 우리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아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지 말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라는 이 말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자의 존재 가치는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지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결코 교회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지 마시고 그리스도로 자신을 과시하십시오. 물론 세상은 그러한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고 가치도 없는 그리스도만을 주장하는 것을 세상은 철저히 무시하고 업신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세상은 심판받을 대상임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분으로 오셨다가 힘없는 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힘의 구조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힘을 포기한 분입니다. 바로 이분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세상에 힘 되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무시하는 것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그것만 과시하고 사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생존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3. 이긴자 됨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3:7)라고 말씀합니다. 천국은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열고 닫는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다윗 언약 속에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누구인가를 보면 됩니다. 그분이 문을 열고 들여보내는데 그것을 막고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나 좀 들여보내 달라'는 요청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내 편에서 노력을 한다고 해서 열리는 문이 아닙니다. 문을 열고 닫는 분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가 예수님이 손에 있는데 우리가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그리스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다른 것을 보려고 합니다. 가장 심한 것이 교회의 우상화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해 버립니다. 예수님에게 의미를 두고, 예수님으로 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신자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9절에서 말씀하는 '사단의 회'입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무리들입니다.

결국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의 이름을 지키고 또 교회라는 단체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교회를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의 회'라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신자는 하늘에서 가치 있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립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에 마음이 없는 자입니다. 하늘의 것의 가치를 진심으로 아는 자는 하늘의 것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마음이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만으로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자입니다. 이것을 승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교인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이겨도 세상에서 이기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 되어야지 하늘에서만 잘난 사람 되면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로 하여금 인내하게 만듭니다.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3:10)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내의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말씀은 신자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승리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얼마든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고 합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굳게 잡은 자는 아무도 그 면류관을 빼앗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라면 우린 결국 하늘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우린 연약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긴자라고 합니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드는 그 은혜와 자비가 실패되지 않음을 굳게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서 우리에게 면류관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면류관은 결코 취소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겨야 할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로 산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이긴자인 것입니다. 때문에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치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주님의 성전의 기둥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기둥을 교회를 위해서 헌신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기둥은 이긴자로 사는 신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자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을 바라보고 살면, 세상에서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섭섭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정신이 들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세상이 주는 헛된 망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적은 능력의 자리로 밀어붙일 때, 그것을 내가 과연 이긴자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천국의 문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다는 말씀이 우리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서 그 말씀으로 인내할 수 있기 바랍니다.

세상에서의 실패가 천국의 실패가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가 하락되는 것 때문이지만 신자는 이미 이긴자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미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며, 적은 능력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긴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승리한 자로서 세상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었고 천국에 이미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이라는 놀라운 가치가 주어진 신자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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