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9,174
오늘 : 3
어제 : 284

페이지뷰

전체 : 78,729,066
오늘 : 4
어제 : 1,181
조회 수 12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신자의 인내와 즐거움

본문 / 13: 9-10

 

1. 믿음의 현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내라는 단어는 대개 현재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어떤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참고 견디는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욥을 예로 들면서 참고 견뎠을 때 하나님께서 배의 축복으로 갚으신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렇다면 인내라는 것이 모든 신자가 아니라 특별히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자에게만 해당되고 요구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실 대다수의 신자들은 인내라는 말을 실감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는 분이라면 인내를 현실적인 신앙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에 반해 어려움과 고통이 없이 편안하게 생활하는 분에게는 인내라는 것이 자신의 현실과는 상관없는 문제로 여겨지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내를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물론 인내는 고난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고난이 없으면 인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삶에서의 어려움과 고통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인내를 그러한 고난의 상황에 있는 신자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2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러한 상황을 마음에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영광과 복이지 예수님의 말씀처럼 미움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주의 이름으로 인한 현실은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의 세계는 언제나 우리의 기대에서 벗어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대를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왜곡된 신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인내

오늘 본문을 보면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9-10)고 말씀합니다.

여기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가고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신앙의 세계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신앙의 세계는 사로잡혀 갈 때도 또 칼에 죽을 때도 하나님이 오셔서 구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의 승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앙의 세계는 사로잡혀가고 마땅히 칼에 죽을 때도 인내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이러한 신앙 세계를 위해서 주를 찾을 것이며 또 누가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앙의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 9절에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 지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세상의 상식을 벗어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길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로잡히고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이 길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패배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그것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힘없이 붙들려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생각입니다.

세상은 자기 구원을 위해 신을 찾을 뿐입니다.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의 삶에서 구출되고, 평안에 평안을 더하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 신을 찾고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도 자기 구원을 위한 것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기 자신이 가야 할 길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들, 즉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구출되고 평안하기만을 원하여 주를 찾는 이들에게는 주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은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 고난이 없기에 인내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다는 것은 견디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견디는 것이 없다는 것은 주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뜻이기에 구원 또한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그런 죽음이 마땅한 자신을 보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우리의 생명이심을 믿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살고자 하는 것이 죄임을 알게 하고 십자가의 길로 끌어가는 능력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세상에 전한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반응을 하겠습니까? 자신을 위해 주를 찾았던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믿음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서 그러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나에게 개입하셨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그런 반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신 상태에서는 자신을 위해 인간의 종교심으로 주를 찾고 또 자신이 원하고 기대하는 종교 세계를 품고 있는 사람은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끌어가는 신앙의 세계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런 자는 참된 믿음을 거부하고, 복음을 배척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말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추구하는 종교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주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환경과 상관없이 바른 복음을 믿는 신자는 그런 세상에서 고난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특별히 우리에게 어떤 의지의 노력을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해서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곧 믿음이며, 믿음이 곧 인내이기에 인내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가 그런 바른 믿음으로 사는 것을 가치 없는 헛된 일로 여길 뿐입니다. 이유는 믿음으로 살아도 세상이 보기에는 잘 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삶의 형편이 달라지지 않고, 때로는 오히려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될 때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를 말하는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세상 가치관을 기준으로 하여 믿음을 차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오직 주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 신자는 믿음에 의해서 알게 된 보이는 않는 세계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견디는 것이고 또 이것이 인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것의 가치를 바르게 알게 합니다. 그 가치를 아는 자만이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도 위엣 것을 찾으며 하늘을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삶

로마서 5장에 보면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환난은 고생을 말하지 않습니다. 환난은 예수님께 붙들려 가는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조롱받으시고 붙들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과 전혀 상관없음을 알게 되고 그럼에도 천국에 소망을 두고 끌려가는 그것이 바로 환난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오직 자기만을 지키고 또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내어놓는다면 그들에게 반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러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엄청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방금 읽은 말씀 앞에 보면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1-2)고 합니다. 여기 말씀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주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과연 그리스도로 인한 즐거움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로 말미암아 즐거움에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즐거움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즐거움이 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교회가 즐거움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여러 모양의 행사로 인한 만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 본질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 길에서 함께 동행하는 지체를 만나서 주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 신자의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신자인 우리에게 이러한 즐거움에 관심을 두고 또 이러한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단지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종교 세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평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공로와 의로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잘 보여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심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욕망이고 이 욕망을 이루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바로 종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가차 없이 이 종교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신자는 고난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그 영광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의지로 고난을 누리고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된 복음에 담긴 엄청난 복된 세계가 고난에서도 복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함으로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속에 보이는 세상 현실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인 천국을 품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마음이 향해 있기에 세상에서 잠시 겪는 고난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척받고 조롱받는 복음이 포기되지 않는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일하심을 실감하게 되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신자이며 우리 안에 성령께서는 신자로 하여금 이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의 길은 세상과는 다른 길입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의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의 길에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앎이 우리를 끝까지 견디게 하며 인내와 믿음에 있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이 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며 그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되었음을 믿는 것이 끝까지 견디는 인내인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32 2023 2월 12일 / (출15:22-26)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관리자 2023.02.12 133
631 2023 2월 5일 / (딛 1:1-4) 하나님이 맡기신 전도 관리자 2023.02.05 165
630 2023 1월 29일 / (민4:1-3) 신자의 봉사와 세상의 봉사 관리자 2023.01.29 104
629 2023 1월 22일 / (고후 9:6-9) 하나님 안에서의 연보(헌금)  관리자 2023.01.29 163
» 2023 1월 15일 / (계13:9-10) 신자의 인내와 즐거움 관리자 2023.01.15 129
627 2023 1월 8일 / (히 2:11-16) /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형제 관리자 2023.01.08 123
626 2022 1월 1일 / (출32:25-29) 하나님 편에 선 자의 헌신 관리자 2023.01.01 159
625 2022 12월 25일 / 성탄절 (눅2:8-14)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관리자 2022.12.25 159
624 2022 12월 18일 / (대상 21:1) 사탄의 충동과 하나님의 뜻 관리자 2022.12.18 191
623 2022 11월 27일 / (레 11:4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관리자 2022.11.27 300
622 2022 11월 20일 / 추수감사절 / (히 13:7-8) 진정한 감사의 추수감사절 관리자 2022.11.20 227
621 2022 11월 13일 / (마 6:14-15) 용서 관리자 2022.11.14 233
620 2022 11월 6일 (창 6:17-22) 하나님의 언약과 내용 관리자 2022.11.06 284
619 2022 10월 30일 / (마 26:33-35) 하나님의 믿음과 인간의 신념 본문 / 마26:33-35 관리자 2022.10.30 236
618 2022 10월 23일 / (마 7:13-14) 좁은 문과 넓은 문 관리자 2022.10.23 271
617 2022 10월 16일 / (엡 5:8-9)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관리자 2022.10.23 291
616 2022 10월 9일 (히 11: 39-40) 믿음의 온전함 관리자 2022.10.09 282
615 2022 10월 2일 / (요 8:31-36)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관리자 2022.10.02 298
614 2022 9월 25일 / (딤전 1:18-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관리자 2022.09.25 308
613 2022 9월 18일 / (마 16:23-25) 자기 부인과 그 목적 관리자 2022.09.18 28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